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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09
한자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기훈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지방에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반대한 개인과 단체의 저항 운동.

[개설]

전통적으로 영암은 전라도 지역 교통의 요지이며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 자본의 주요한 침투 대상으로, 강한 경제적 침략의 위협 아래 놓여 있었다. 여기에다 일찍부터 사족의 문화가 발달하고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었던 만큼 항일 운동의 전통도 뿌리 깊었다.

[3·1 운동]

3·1 운동 직후 영암에서도 조극환(曺克煥)이 주동이 되어 3월 11일 영암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관헌이 눈치를 채고 감시를 강화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3월 20일에도 몇 곳에서 밤에 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는 산호(山呼) 투쟁을 벌였으나 산발적인 데 그쳤다.

이에 영암읍조극환·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旼燮)과 군서면 서구림리의 최한오(崔漢五)·박규상(朴奎相)·조병식(曺秉植)이 연락하여 읍내와 구림 두 곳에서 동시에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거사 계획에 따라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아침 9시 영암과 구림에서 보통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시에 모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영암에서는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영암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이 집결하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가를 부르며 읍내 중심가로 진출하였다. 시위 군중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1,000여 명에 달했다. 한편 구림에서도 9시 최기준(崔基俊)조병식(曺秉植)이 구림 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 만세를 부른 다음 300여 명의 대열을 이끌고 행진하여 면사무소로 쇄도하는 등 시내를 누볐다.

시위 다음날인 11일부터 일제는 시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영암읍과 구림의 지사와 청년·학생 등 약 30여 명이 끌려갔으며, 그중 20여 명은 5개월에서 2년간 징역형을 살았다.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던 박규상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3·1 운동 이후의 전개 상황]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영암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창립 이후 1924년까지는 독서회, 노동 야학, 유치원, 여자 강습소 등 계몽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또, 1922년 영암 소년단 창립을 지원하고 소년단 창립 1주년을 맞아서는 전조선 소년 서화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무산 아동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낭남 학원(朗南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 4월 조선 청년 총동맹에 가입한 이후에는 사회주의로 전환하여 1925년 10월 총회에서 회원의 연령을 30세로 제한하고 노농부를 설치하는 한편, 소작인회와 머슴회의 조직과 후원을 논의하는 등 이른바 ‘혁신’을 시도하였다.

영암 청년회는 이후 좌우 합작의 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新幹會)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공개적 정치 활동과 좌우익 협동 전선의 필요에 공감한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연계하여 결성하였다. 신간회 영암 지회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27년 8월 20일 결성되어 김민규(金敏奎)가 회장, 김상학(金相鶴)이 부회장을 맡았으며, 한동석(韓銅錫)·하헌훈(河憲勳)·최헌(崔憲)·손길조(孫吉祚)·조치환(曺致煥)이 총간사를, 하헌훈·신민섭(申敏燮)·이순명(李順明)·최기동(崔基東)이 상무 간사를 맡았다. 각 지역에 분회를 설립하였으며, 조직에 참가한 사람들이 각 분회에서 지역에 적합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총간사 한동석은 영암 분회장을 맡으면서 청소년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1929년 12월 22일 조직 개편으로 위원제를 채택하여 신학균(申鶴均)이 위원장을 맡았고, 조사원(曺士元)·김준현(金俊鉉)·조만암(曺萬岩)·한동석·하헌동 등 18명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동석은 검사위원장을 겸하였고 신학균이 전국 대회 대표를 맡았다. 최기동, 한동석, 조사원 등 영암 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 중 다수가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한편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다수의 영암 출신 학생들도 여기에 참가했다. 성진회 및 독서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1928년의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구속된 바 있는 군서면 출신 최규창(崔圭昌)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검거되어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 외에도 최상호(崔相鎬), 김필재(金弼載), 문학연(文學淵), 류상걸(柳上杰), 이춘수(李春洙), 박인배(朴仁培), 이상철(李相哲) 등의 학생들이 광주 학생 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자가 급속히 확대되었고, 영암에서도 사회주의를 수용한 청년들이 1930년대 항일 운동을 주도했다.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의 당 건설을 원칙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적 대중 조직을 먼저 건설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보았다. 전라남도의 사회주의 운동은 군 단위의 혁명적 농민 조합, 즉 적색 농민 조합 건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영암에서는 해방 운동 영암 중앙 본부·영암 공산주의자 협의회·전남 운동 협의회 등이 모두 적색 농민 조합 건설을 위한 운동 조직이었다.

영암에서는 1930년 5월 최기동(崔基東), 최헌원, 곽명수(郭明秀) 등이 해방 운동 영암 중앙 본부를 결성하고 농민 조합을 결성하고자 했으나 최기동이 검거되어 실패했다. 이어 곽명수, 김판권(金判權), 최판옥(崔判玉) 등은 1932년 4월 영암 공산주의자 협의회를 결성하고 농민을 조직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음력 5월 1일인 6월 4일 영보정에 모여 노동절 기념식을 개최한 다음 적기를 앞세우고 노동가를 부르며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 일본인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함께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은 사건 직후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켜 10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그중 73명이 예심에 넘겨졌다. 주된 활동가 중 김판권, 유용희(柳龍羲), 곽명수 등은 징역 5년에 처해지는 등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렀으며 이들이 운영하던 야학도 모두 폐쇄되었다.

1933년 초에는 해남과 완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인 김홍배(金洪培)와 황동윤(黃同允)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활동하다 농민 운동 중심의 대중 운동을 지도할 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전남 운동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장흥, 강진, 영암 지역의 활동가들과 연계하였는데, 영암에서는 최규문(崔圭文)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최규문최기섭(崔琪燮), 채우동(蔡又童) 등 구림리 청년들과 함께 1932년 8월부터 마을을 중심으로 동지를 포섭하고 조직을 건설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구림의 사회주의 청년들은 1933년 전남 운동 협의회와 연결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추진했다. 이들은 농촌 진흥회에 참가하고 야경단을 만드는 등 관제 조직의 농촌 청년들을 규합하여 농민 조합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1934년 2월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나 와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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