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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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한성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10월 31일 - 영암 구림리 토기 요지 사적 제338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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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7월 28일 - 사적 제338호 영암 구림리 토기 요지에서 영암 구림리 요지로 개칭 |
가마터 | 영암 구림리 요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박물관 | 영암 도기 박물관 -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 있는 영암 구림리 요지에서 확인된 국내 최초의 시유 도기.
[유적 현황]
시유 도기(施釉陶器)는 유약을 바른 도기를 뜻한다.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시유 도기는 사적 제338호인 영암 구림리 요지(窯址)[가마터]에서 확인되었다. 이 가마터는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남송정 마을에서 ‘돌정 고개’라고 불리는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구릉은 월출산을 남쪽에 둔 양지바른 곳으로, 상대포까지 700~800m에 다다르는 거리가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구릉 전체에 가마터 20여 곳이 분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에 대하여 1987년과 1996년에 이화 여자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가마는 푸석푸석한 돌이 많이 섞인 지층인 석비레층(石비레層))의 경사면 아래에 굴을 파고 들어간 지하식 단실(單室) 오름가마[登窯]로 밝혀졌다.
가마 바닥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소위 독사 머리 모양이다. 가마 앞쪽은 경사가 10° 안팎을 유지하다가 뒤로 갈수록 20~25°로 경사가 급해지고 너비가 좁아져 가마 끝부분이 굴뚝이 되어 수직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봉통[가마에서 불을 때는 시설]은 타원형이고 봉통 입구에는 돌을 쪼개어 놓은 할석(割石)으로 구성된 배수로 시설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마터에서는 시유 도기를 비롯한 네모 병과 회전 타원체형 병, 항아리, 단지 등 대부분 일상생활용 도기들이 출토되었다.
[시유 도기]
한국의 도자기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부터 민무늬 토기, 연질 토기, 경질 토기를 거쳐 유약을 바르지 않은 무유 도기(無釉陶器), 시유 도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시대별로 뚜렷한 특징을 갖춘 다양한 그릇이 등장하여 발전을 거듭하였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유약을 바른 시유 도기는 통일 신라 시대에 등장하여 고려 시대 청자가 발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시유 도기는 고려의 황갈유·녹갈유·흑갈유 도기와 조선의 녹갈유·흑갈유 도기, 근세의 적갈유 옹기까지 중간 색조의 은은한 광택을 지닌 유약을 입혀 생활에 친근한 도기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는 바탕흙이 치밀한 경질의 무유 도기와 시유 도기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그릇들은 바탕흙의 질적인 평가에 따라 토기 또는 도기라는 명칭으로 혼용되고 있다. 치밀한 조직의 바탕흙과 비교적 낮은 흡수율, 높은 온도의 환원 번조(還元燔造)[가마 온도가 1,100℃ 이상일 때 산소의 공급을 막아 불완전 연소가 되게 하여 도자기를 굽는 방법] 등을 고려하면 도기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며 연유(鉛釉)·회유(灰釉) 등의 유약을 바른 도기는 시유 도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유약은 주로 땔감으로 쓰인 나무의 재를 이용해 다양한 색상을 구현하여 도자기를 아름답게 꾸며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은 온도로 굽는 고화도(高火度) 시유 도기는 구림 도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마 내의 온도와 굽는 위치 등에 따라 녹갈색 등 다양한 색상을 띤다. 유약은 그릇의 표면에 유리질의 피막을 입혀 기능적으로 액체가 새는 것을 막아 주고 매끄러운 표면 덕분에 이물질이 묻지 않아 위생적일 뿐만 아니라 장식적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예술성을 추가하여 미술적 완성도를 높여 준다. 또한 식품의 저장성과 함께 발효 기능도 갖추고 있어 우리의 전통 음식 문화와도 잘 맞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구림 도기에 사용한 그릇의 바탕흙은 가마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이다. 유약은 번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나뭇재와 흙물 등을 혼합하여 사용하는데, 철분 함량과 번조 온도 등에 따라 녹갈색·황갈색·흑갈색 등의 은은한 광택을 드러낸다. 이처럼 구림 도기는 가마 주변에서 원료를 구하여 생산하기 때문에 많은 가마에서 동시에 대량으로 도기를 생산하였으며 상대포를 이용하여 주변에 손쉽게 공급할 수 있었다. 대량 생산과 실용성이라는 이러한 장점은 시유 도기의 독특한 아름다움과 함께 지속적인 소비층을 형성하여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계속 생산되었다.
[청자와의 관련성]
시유 도기의 제작은 안정된 바탕흙은 물론이고 유약 제조 등 제작 기술을 비롯하여 고온을 유지할 수 있는 가마 축조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특히, 높은 온도의 유지와 환원 번조, 유약의 등장은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여 청자가 발생하는 여건이 되었다.
시유 도기 이전에는 고온으로 번조(燔造)[도자기 등을 구워 만들어 내는 일]하면서 바탕흙에 함유된 성분과 땔감이 타면서 발생하는 재가 반응하여 자연적으로 유리질이 형성된 자연유(自然釉)가 있었다. 그러다가 영암 구림리 요지에서 확인된 시유 도기와 같이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인공으로 만든 유약을 바른 회유 도기(灰釉陶器)가 출현했다. 회유 도기는 치밀한 회청색 바탕흙에 유약을 바른 후 번조하기에 청자 제작의 직전 단계까지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곧, 통일 신라 시대가 끝날 무렵인 10세기 전반에 활발히 운영되었던 영암 구림리 요지의 시유 도기는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시유 도기로, 강진과 해남 등 서남해안 일대에서 국내 최대 규모로 왕성하게 생산하였던 청자의 발생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구림리의 가마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발전한 제작 기술을 습득하여 경질 도기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 도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구림 도기가 이른 시기에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오늘날의 완도에 설치된 청해진을 중심으로 장보고의 해상 무역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9세기 국제 무역항이었던 상대포와 가까웠던 청해진을 통한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은 청자와 백자를 비롯한 다종다양한 시유 도기의 유입을 촉진하고 이미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도기 제작 기술에 변화를 가져와, 높은 온도의 환원 번조에 더하여 유약을 녹이는 생산 기술을 개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술에 다시 청자와 백자의 기술이 더하여져 강진과 해남, 장흥, 함평, 고흥 등에서는 청자의 생산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활용]
영암 구림리 요지는 발굴 조사 후 유적의 규모와 구림 도기의 앞선 기술력, 시유 도기의 중요성 등을 인정받아 1990년 10월 31일 사적 제338호 ‘영암 구림리 토기 요지’로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 고시를 통해 지금의 ‘영암 구림리 요지’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재는 1987년과 1997년에 발굴된 가마터 두 기를 원형 그대로 현장에 보존하여 보호각을 세워 전시하고 있다.
또한 인근의 폐교 부지를 활용하여 구림리의 가마터에서 출토된 도기를 연구·수집·전시·재현·판매하는 영암 도기 박물관을 건립하고 관광 교육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암 도기 박물관은 기본적인 전시뿐만 아니라 교육 기능까지 강화한 복합 문화 시설로, 새로운 개념의 열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마을인 구림 마을의 전통과 자연, 문화적 환경 등을 보존하고 이를 구현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체험을 통해 관람객이 직접 흙을 다져 보고 물레를 돌려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든 그릇에 유약을 발라 자신만의 그릇을 만들 수 있다. 즉, 관람객은 흙으로 대변되는 자연과 직접 대화를 하고 이를 몸과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라남도 영암군은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시유 도기인 구림 도기에 역사성과 지역성을 더하여 황토를 이용한 자체 상표의 시유 도기를 개발함으로써 자체적인 문화 자원으로 생산하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품질이 뛰어나고 인체에 무해한 미생물이 풍부하게 살아 있는 황토 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영암 지역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의의]
영암 구림리 요지에서 확인된 구림 도기는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시유 도기로서 자기 발생의 직전 단계, 곧 도기 문화에서 자기 문화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유 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뚜렷이 보여 준다. 다시 말해, 구림리의 시유 도기를 비롯한 전통적 도기 제작 기술이 바탕이 되어 중국의 선진 자기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전라남도의 해남·강진·고흥·함평·장흥 지역을 비롯한 서남해안 일대에서 고려청자가 왕성하게 생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이미 이 지역에 자기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과 높은 기술력, 탁월한 가마 운영 능력을 비롯하여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림 도기는 도기에서 자기로의 이행이라는 우리나라 도자기 변천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