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022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 있었던 덕진 다리에 얽힌 이야기.
[개설]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덕진면 경계에는 영암천이 흐르는데, 옛 이름은 덕진천이다. 덕진천에는 덕진교가 놓여 있었고, 덕진교의 서쪽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덕진포 포구였다. 덕진교는 덕진면 덕진리 교변 마을과 영암읍의 역리 마을 사이에 있어 나주에서 영암읍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통과하여야 한다.
그런데 조선 시기 덕진교는 지금의 위치보다 약 60m 서쪽에 있었다. 한때 덕진 석교가 일부 복원되어 있었으나 2009년 무렵 하천 공사 시 제거되고 대신 징검다리가 만들어져 있다. 이 덕진교에는 신라 때 덕진이라는 여인이 생전에 돈을 모아 두었다가 죽어서 영암의 원님에게 현몽하여 다리를 놓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덕진교의 덕진 여인 설화]
통일 신라 때 덕진이라는 여인이 지금의 영암천변에서 주막집을 운영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강진 등 남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로 중 하나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그런데 손님들은 강에 다리가 없어 건너는 데 불편을 겪었다. 특히 장마철에는 하천의 강물이 불어나 목숨마저 위협했다. 덕진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다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한 푼 두 푼 땅속 항아리에 묻기 시작하여 300냥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그러나 덕진 여인은 원인 모르는 병에 걸리어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서 소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영암 원님이 부임해 왔다. 첫날 밤, 원님의 꿈에 소복을 입은 부인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죽은 덕진 여인 이었다. 덕진 여인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묻어놓은 돈 삼백 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날이 밝자 원님은 덕진 여인이 일러준 곳을 파보았다. 과연 삼백 냥이 발견되었다. 원님은 이 돈으로 큰 다리를 놓은 다음 덕진 여인의 이름을 따서 덕진교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덕진 여인의 업을 기리기 위하여 군민들은 속칭 덕진비를 세웠다.
이러한 덕진교 설화는 전라북도 고창군 강선교의 설화와 흡사하다. 강선교 설화는 조선 성종 때,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의 알뫼장에서 주막집하는 기생 강선이 돈을 모아 흥덕 원님에게 주어 손님들을 위하여 갈곡천에 다리를 놓게 하였고, 주민들은 강선의 업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영암의 덕진 여인 설화의 사실 여부를 살펴보면 어떠할까? 강선교 설화와 유사성, 비현실성, 천년 이상 설화가 구전되어 왔다는 사실은 설화적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쉬이 알 수 있다. 덕진의 지명 유래와 역사적 사실, 덕진교의 덕진비에 기록된 내용 등으로 덕진 여인 설화를 검토하여 보고 진정한 덕진 여인 설화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덕진의 지명 유래]
덕진(德津)은 원래는 돌[石]의 영암 토속어 독[德]과 나루[津]의 한자 표기이다.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석교를 덕달(德達)로 표현한 예도 있다. 흔히 나루의 주변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경우에 독나루라 칭했으며, 한자로 석진(石津)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영암의 독나루 서쪽에는 바다 갯고랑과도 연결되어 배가 드나드는 독나루개, 즉 덕진포가 있었다. 또 덕진교의 북단에는 덕진장이 일제 강점기에 개설되어 1980년 무렵까지 존재하였다. 그리고 영암 덕진교의 하단을 흐르는 냇가는 덕진천이다. 다리 이름 외에도 덕진천[강], 덕진포, 덕진장도 덕진 여인과 관계되어 명명 또는 개칭된 이름으로 보기에는 자연스럽지 않다.
덕진이라는 지명은 포구인 덕진포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덕진포 지명은 고려 시대에는 무안군에서,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에서 사용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서 덕진포는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덕암리의 덕포(德浦)를 말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곳에는 고려 60대 조창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영암군 독나루개를 덕진포로 칭하게 되자 무안의 덕진포는 덕포로 개명되었다.
조선 시대 영암군의 덕진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처음 확인되는데 덕진교와 함께 “영암군의 북쪽 5리”에 있었다. 조선 초기 덕진포의 덕진교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서거정은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덕진천에는 독나루, 즉 덕진이 있었으며 조선 전기에 다리가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독나루의 덕진교]
덕진교는 영암군의 남쪽에 사는 강진, 해남, 진도 사람들이 영암과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가고자 할 때는 꼭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다. 조선 시기에 들어와 역로가 바뀌면서 덕진교를 건너게 된 것이다. 해남 등에서 나주로 향하는 고려 시대 역로는 영암읍을 거치지 않고, 영원재를 넘어서 오림역[현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오림리]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해남~영암읍~덕진교~신안역[현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신원리]을 거치는 길로 변동되었다. 이렇게 역로가 바뀌면서 영보역도 덕진면 영보리에서 영암읍 역리 마을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조선에 들어와서 덕진교 주변이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이에 비추어 통일 신라 때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로 덕진교 주변이 북적거렸다는 설화는 타당성이 낮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덕진 설화의 시기는 통일 신라 말이다. 이의 전거는 무엇일까?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등장하는 이른바 덕진포 해전이다. 덕진포는 『삼국사기』에서는 ‘德津浦’로, 『고려사』에서는 ‘德眞浦’로 서로 한자 표기가 다르나 동일한 곳이다. 덕진포 해전은 ‘912년 왕건의 병선들이 나주 포구[현 영산강의 몽탄 인근]에 이르렀을 때 이에 맞서는 견훤은 수로에는 병선들을 목포[몽탄 인근]에서 덕진포까지, 육지에는 군사를 배치하고 전투에 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덕진포는 영암이 아니라 무안군에 있었다.
따라서 덕진포 해전에 등장하는 덕진포를 영암군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면서 덕진 여인 설화의 시기 역시 통일 신라 말로 설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덕진교 비석들이 말하는 덕진교의 역사]
독나루에 건설된 덕진교는 조선 초기에 목교에서 언젠가 조그만 석교로 바뀌었다가 다시 대석교로 변모한 듯하다. 이는 두 개의 비석, 즉 덕진면 덕진리 교변 마을 서동열 댁의 비석과 덕진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전자의 비석 내용을 보면, “1812년에 나주 제도[현 신안군] 사람 김준철과 최천복이라는 사람이 다리를 처음 놓았으며, 1843년에 덕진교 인근에 사는 최필용이 중건하였다(嘉慶十七年壬申(1812) 四月 金俊哲 崔天卜 羅州諸島 初建/道光二十三年(1843) 癸卯三月 靈巖德津橋居崔必龍重堅).”라고 하고 있다. 후자 덕진비는 덕진 여인을 기리는 비로 알려져 있으며, 1813년에 덕진교의 북단에 세워졌다. 덕진비의 전면에는 “대석교 창주 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라 기록되었다.
이러한 두 비석으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자 덕진교는 초건이라 하였으나 여러 기록에서 이미 덕진교의 존재는 확인된다. 때문에 작은 석교였으나 대석교의 초건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지금의 신안군 섬사람이 왜 덕진교를 대석교로 건설하여 주었는지는 설명이 없지만 정황상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당시 대석교 건설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이므로 신안군 섬 주민인 두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물을 팔아 돈을 많이 번 대상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덕진포는 영암군 읍치의 포구였으므로 신안군 해산물의 물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덕진 포구에서 돈을 많이 벌어 1812년에 대석교를 놓아준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덕진 여인의 업을 기렸다는 덕진비는 다음 해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1813년 세운 덕진비는 덕진 여인과 관련된 비가 아니라 1812년 지금 신안군 사람인 김준철과 최천복이 대석교를 놓아준 덕업을 기리는 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도 왜 덕진 여인인가?]
위와 같이 살펴보았듯이 덕진 여인의 설화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아 맞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덕진 여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여기며, 매년 덕진 여인의 추모제를 여는 것일까?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덕진 여인은 주막집을 운영하면서 어렵게 번 돈을 모아 놓고 죽어서까지 남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였다. 이러한 고결한 정신만은 현재 우리들이 귀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런 뜻을 살리고자 덕진면 주민들은 덕진 여인을 숭모하는 제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덕진 여인의 애환, 즉 ‘남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자.’라는 숭고한 뜻을 새겨야 한다. 또한 이러한 미풍을 오래도록 남기려는 덕진면 주민들의 깊은 지혜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덕진 다리에 얽힌 덕진 여인의 애환을 오늘에 사는 우리들이 마음속에 새겨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