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7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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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津-女人-德津-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
집필자 | 변남주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2년 12월 11일 - 「덕진이라는 여인이 세운 덕진 다리」, 변남주가 서동열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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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덕진이라는 여인이 세운 덕진 다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교번 마을 |
채록지 | 「덕진이라는 여인이 세운 덕진 다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교번 마을 |
채록지 | 「앉은뱅이 설화」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교번 마을 |
성격 | 인물담|지명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덕진|원님 |
모티프 유형 | 미천한 신분인 덕진의 선행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교번 마을 덕진교에 얽힌 이야기.
[개설]
주막을 운영하는 덕진이라는 여인이 죽어서 새로 부임한 원님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모은 돈으로 다리를 놓아 달라 부탁하는 이야기이다. 원님은 덕진의 부탁대로 다리를 놓고 다리에 덕진의 이름을 붙였다.
[채록/수집 상황]
변남주가 덕진면 덕진리 교변 마을 주민 서동열에게서 2012년 12월 11일 인터뷰 채록하였다.
[내용]
덕진면 덕진리에 있는 덕진교(德津橋)는 옛날에 영암 이남 사람들이 영암과 나주를 거쳐 서울로 가고자 할 때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덕진교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함께 전해 오고 있다.
통일 신라 말 영암천 변에서 주막을 하는 덕진이라는 여인이 살았다. 당시 영암천은 해남 등 남해 지역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목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러나 영암천에 다리가 없어 사람들은 비만 오면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덕진은 여러 해 동안 이 모습을 보고 스스로 돈을 모아 다리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한 푼 두 푼 땅속 항아리에 모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영암에 원님이 새로 부임하였는데, 부임한 첫날 밤 원님의 꿈에 소복을 입은 여인이 동헌 뒤뜰에 앉아 소원을 말하였다. 내용인즉 자신은 영암천 변에 살던 덕진인데, 사람들이 편하게 하천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으며 이를 위하여 돈 300냥을 자기 집에서 동쪽으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묻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원님은 잠이 깨자마자 수하를 시켜 덕진이 말한 곳을 파 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300냥이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원님은 그 돈으로 영암천에 큰 다리를 놓은 다음 여인의 이름을 따서 ‘덕진교’라 이름을 붙였다.
그 후 덕진교에는 한 가지 설화가 더 보태어졌다. 기어 다니던 앉은뱅이가 덕진교에서 서서 걸어갔다는 설화이다. 1813년(순종 13)에 덕진의 덕업을 기리기 위하여 덕진교 북쪽에 대석교 창주 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를 세운 다음 지금까지 매년 단오에 제향을 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덕진이라는 여인이 세운 덕진 다리」의 모티브는 ‘미천한 신분인 덕진의 선행’이다. 이는 조선 성종(成宗) 때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의 알뫼장에서 기생 강선이 돈을 모아 갈곡천에 다리를 놓았다는 강선교의 유래와도 흡사하다. 현실성은 다소 떨어지나 덕진의 공덕 사상을 후대에까지 전달하고 본받고자 하는 염원이 짙게 깔려 있다. 지명 유래담과 인물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