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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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곽승혁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를 일컫는 말로서 루터가 독일에서 일으킨 종교 개혁을 시발로 기독교에서 분리된 교파이다. 로마 교황청 중심의 구교[가톨릭]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낀 루터가 본연의 신앙을 회복코자 종교 개혁을 일으켰으며, 이에 동참하는 교회들이 하나둘 늘어나 초기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였다. 국내 개신교는 1885년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에 의하여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영암군의 경우 당시 개항장이었던 목포에서 개신교가 유입되었다. 호남 서남 해안 지역 선교는 목포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1907년 가을에 부임한 맥컬리(H. D. MaCallie)[맹현리] 선교사에 의하여 호남 교회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맥컬리 선교사가 부임하기 전까지는 각 지역에 뿌리 깊게 박힌 외국인에 대한 불신과 각 지역의 항교를 중심으로 한 유교 문화 때문에 전도 활동이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나 의료 봉사와 교육 활동으로 인해 점차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영암군의 첫 교회로 알려진 영암읍 교회도 맥컬리 선교사에 의해 1917년에 세워졌다.
[변천]
영암 지역의 대표적인 개신교회는 영암읍 교회이다. 영암읍 교회는 영암읍 교동리에 한 초가를 임대하여 설립하였으며, 교회 설립 초기에는 목포 선교부에서 교역자를 파견하였다. 교회 관리는 최경화 장로가 영암, 강진, 장흥, 해남을 순회하면서 이 일대의 초창기 교회들을 보살폈다.
1920년에 영암읍 서남리 127번지에 교회당을 짓고, 1923년에 신학교를 졸업한 김세열 전도사가 부임하여 영암읍 교회를 담당하였다. 당시 젊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한 김세열 전도사는 청장년 전도에 주력하여 김원배, 천수봉, 오국삼, 하상은, 김옥진, 김윤자 등이 주축이 되어 영암읍 교회를 부흥시켰다.
점차 성장기로를 걷고 있었던 영암읍 교회는 두 번의 큰 시련을 겪게 된다. 1940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당이 전소되었다. 당시 박병근 전도사와 김주철 성도가 투옥되어 2년 후 석방되었으나, 박병근 전도사는 옥고의 후환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세 차례나 자리를 옮겨 예배를 진행했다.
두 번째 시련은 6·25 전쟁기에 찾아왔다. 1950년 교회당으로 신축 공사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인민군이 영암읍에 도착한 시기는 10월이었다.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추수기에 피난가지 못한 교인들 24명이 인민군의 인민재판을 통해 순교하였다. 그리고 신축 공사 중이던 교회당은 인민군의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영암읍 교회에서는 이를 기념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1953년 함태영 부통령의 친필을 받아와 교회 한편에 순교비를 세우고, 순교자 명단을 새겨 놓았다.
6·25 전쟁 이전까지 영암군에 세워졌던 교회는 10여 개 정도로 영보리 노송 교회, 학산면 상월 교회, 매월 교회, 독천 교회, 시종 교회, 신흥 교회, 삼호 교회, 구림 교회, 서호 교회, 금정 교회 등이 있었다.
[현황]
한국 세계 선교 협의회 2003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 교단 현황은 총 10개 교단에 63개의 분파에 이르며, 가장 큰 교단인 장로회의 경우 49개의 분파가 존재하고 있다. 2012년 현재 영암군에는 103개소의 개신교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한국 기독교 장로회 교단이 가장 크다.
영암군 지역의 초기 교회인 영암읍 교회, 구림 교회, 천해 교회 등 9개의 교회는 6·25 전쟁기에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영암군에 주둔한 북한군과 빨치산들에 의하여 89명의 영암군 교인들이 순교하였으며, 그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하여 순교비와 영암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더불어 순교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6월 25일이 다가오면 영암군 교회 협의회 주관으로 영암 순교자 기념관에 모여 추모 예배를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