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15
한자 說話-同和-寺刹浮石寺
영어공식명칭 A Temple of Tale and Harmony, Buseok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박병선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의 고찰 부석사에 얽힌 설화와 역사적 의미.

[개설]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 있는 부석사(浮石寺)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에 의해 창건한 전통사찰로, 의상대사선묘(善妙)와의 애틋한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의상은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창시자로 부석사 창건과 더불어 사역(寺域) 또한 의상의 화엄사상에 따라 조성되었으며, 화엄사상은 호국불교의 기능도 하였다. 이러한 의상의 화엄사상은 우리나라 불교계는 물론 일본 불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부석사 창건 설화-용이 된 선묘낭자]

선묘부석사의 수호신과도 같고 부석사의 창건 동력으로 중국의 『송고승전(宋高僧傳)』과 우리나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고 있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661년(문무왕 1) 당시 중국에서 한창 성행하던 화엄교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황해를 건너 산둥반도[山東半島] 등주(登州)에 도착한 의상이 몸이 불편하여 어느 불교 신도의 도움으로 그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그 주인집 딸이 선묘였는데, 의상의 높은 덕과 맑고 기품 있는 용모에 연민의 정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는 연민의 정을 한 차원 높게 승화시켜 마침내 의상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법과 스님 앞에 귀의할 것을 눈물로 맹세하면서 자신을 거두어 인도해 주기를 간청하며 빌었다. 그러나 의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종남산(終南山)으로 떠났다.

의상은 장안(長安)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대사(智儼大師)의 문하에 들어가 10년 동안 화엄학을 닦아 스승의 가르침보다 훨씬 깊은 경지에 이르러 귀국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신라 침공 계획을 미리 알고, 이를 고국 신라에 알리기 위해서 일찍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길에 등주에 들러 10년 전 머물렀던 고마운 인연인 선묘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불단 앞에서 합장하고 염불 삼매에 잠긴 뒷모습만 보고 선묘의 마음을 어지럽힐까 두려워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 선묘가 선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상이 탄 배는 수평선 너머로 가고 있었다. 선묘는 10년 동안 의상을 기다리며 손수 지은 가사와 장삼이 담긴 옷상자를 힘껏 바다 위에 던지면서 하늘을 우러러 소원을 빌었다. “불보살님이시여, 불법의 뜻이면 이 옷상자가 배에 오르게 하소서.”라고 하였더니 옷을 담은 상자는 바람을 타고 바다 위를 달려 뱃전에 올랐다. 이어서 “이 몸이 용이 되어 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리라.”라고 맹세하고 바다로 몸을 날렸다. 과연 선묘의 애절한 서원(誓願)[불교에서 원(願)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자 맹세하는 일]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용이 된 선묘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여 푸른 파도의 험난한 바닷길을 무사히 건너게 하였다.

귀국 직후 의상이 문무왕에게 당의 침공 계획을 알리고, 5년간 전국을 다니며 절터를 찾다가 인적이 드물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전쟁의 먼지가 오지 않는 명당에 이르렀다. 여기서 화엄교학을 펴고, 왕명을 받들어 큰 절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이교도의 무리들이 터를 차지하여 비우지 않았다. 이에 용이 된 선묘는 반석을 공중에 띄워 놀라운 괴력을 보임으로써 방해하는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절이 완성되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선묘룡(善妙龍)은 오래도록 의상의 법을 받들고 도량을 지키기 위해, 그 넋이 석룡이 되기를 발원해 법당 아래 묻혔다고 한다. 현재 부석사에는 선묘와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무량수전 본존의 대좌 밑에 머리를 두고, 굽이를 틀어 그 꼬리 끝이 뜰 앞 석등 아래쯤에 묻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석룡의 허리를 잘랐다는 전설처럼 실제로 허리 부분이 끊어져 있었다. 또 무량수전 서쪽 옆 언덕 아래에 있는 부석은 선묘룡이 이교도를 물리친 반석이며, 이러한 선묘의 화상을 안치한 선묘각이 무량수전 뒤쪽에 있다.

사찰의 창건에 용과 관련된 설화는 『삼국유사』에 많이 등장하지만 다른 문헌설화에도 비슷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송고승전』의 선묘설화는 용이 부석사의 터전 마련과 창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은 평소 “내가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왕을 동해에 장사 지내고[대왕암(大王岩)] 절을 지어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 금당 아래에 용혈을 파서 용이 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이와 같이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용과 나라를 지키는 지킴이라는 용도 있다. 이런 사실이 불교에서 유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용이 불법도 수호하고 불국토인 나라도 수호한다는 것이다. 승려가 비법을 전수하는 데도 용과의 친연성을 가진 사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호법룡 신앙이 널리 퍼진 가운데 이러한 설화가 탄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화엄세계를 구현하다]

부석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전통 사찰이다. 단일 사찰로는 주요 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국보 5점, 보물 6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다. 또 한국 불교사상의 맥을 이룬 화엄사상의 산실이기도 하며, 한국 10대 사찰의 하나로 한국 불교문화의 성지가 되고 있다.

화엄사상은 대표적인 대승불교사상으로 『화엄경』을 기본 경전으로 하며, 화엄이 최고의 가르침인 원교(圓敎)라고 강조한다. 화엄사상의 특징은 연기설에 있는데, 관계의 얽힘이 끝없이 이어져 있으며, 어떠한 일에도 걸림이 없는 세계인 법계연기를 뜻하는 것으로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기도 하다.

화엄사상은 삼국시대에 수용된 이래로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사상으로 발전해 왔으며, 종단이 성립되고 교학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원효(元曉)와 의상의 활동에서부터 비롯된다. 의상은 당에서 유학하던 중 지엄대사에게 화엄을 배운 뒤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저술함으로써 자신의 화엄학을 체계화하였다. 670년(문무왕 10) 귀국하여 화엄종을 개창하고, 676년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태백산과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실천행(實踐行)을 중시한 것이 특징으로 관음 신앙과 아미타 신앙으로 표출되었으며, 세속의 신분을 초월하여 문도를 양성했는데, 의상의 화엄종 개창은 한국 불교사에서 화엄사상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의상 화엄학의 특질은 ‘의지(義持)’라는 그의 별호에 걸맞게 실천운동을 근본으로 삼았다. 의상의 신앙은 낙산사(洛山寺)의 창건 설화에 나타난 ‘관음 신앙’과 부석사 아미타불의 봉안으로 알 수 있는 ‘아미타 신앙’이다. 현실의 고난에서 구제하려는 관음 신앙과 극락왕생을 희구하는 아미타 정토 신앙이 부석사의 조형과 불상 봉안에도 반영되었다. 의상은 일승(一乘)의 아미타불을 숭앙(崇仰)하여 보처(補處)[부처의 자리를 보충한다]도 없는 아미타불만을 모셨다.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아미타여래만을 봉안하고 있다.

의상은 아미타불을 화엄사상과 같은 일승으로 이해한 동시에 열반에 들지 않고 생멸상이 없는 현재불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의상의 인식은 신앙의 대상이 세대적 계열에 있는 과거의 석가불과 미래의 미륵불 대신 아미타불로 바뀐 중국의 신앙 대상 변화와도 상통한다. 즉 의상은 온 우주를 포섭하는 화엄이라는 사상적 배경 위에 극락정토의 현실화, 신라의 정토화를 위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이러한 의상의 화엄사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국보인 「화엄연기(華嚴緣起)」는 교토(京東) 고산사(高山寺)에 보관된 두루마리식 긴 화첩인데, 부석사의 창건 모습과 의상·원효·선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또 고산사에는 의상의 초상화가 있고, 그 별원인 선묘사(善妙寺)에는 선묘의 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선묘상은 한때 고산사에 옮겨져 의상의 초상화와 함께 안치되어 있다가 지금은 교토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에도 화엄사상이 널리 전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국을 기원하다]

삼국의 불교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처음부터 왕실불교, 귀족불교와 더불어 호국불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고 부석사를 창건한 것은 의상의 화엄사상이 문무왕의 전제 왕권을 뒷받침해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 문무왕의 명에 의해 창건된 부석사도 호국사찰이다. 화엄사상도 호국을 위한 일심으로 민중 단결과 화합을 꾀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더욱 확대된 통일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삼국의 이질성을 아우르는 통일 이념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원효와 의상은 중국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 바탕 위에 신라의 실정에 맞는 이론을 구성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실천적 노력을 기울였다.

의상과 문무왕과 관계는 역사 기록에 세 군데 언급되고 있다. 하나는 671년(문무왕 11)에 당군의 침공을 알렸고, 다음은 왕명에 의해 부석사를 창건하였고, 마지막으로 왕도(王都)에 성을 쌍기 위한 의견을 개진한 사실과 이로 인한 왕의 호의를 거절한 기록이 전부이다. 문무왕과 의상과의 관계는 세 번의 기록이 전부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상당히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무왕이 왕성을 쌓을 때 의상의 의견을 묻고, 전장과 노비를 하사했으나 이를 거절한 내용은 보통 관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진솔한 의견을 담은 서신이 오고 갈 정도로 문무왕과의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석사가 호국사찰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의상부석사에서 우리나라 화엄종을 개창한 것은 종남산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한 중국의 화엄종을 그대로 옮겨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상이 전파한 화엄종은 민중적 지향성을 가진 정토론적 화엄종이란 사실에 주목해야 하고 우리나라 불교의 자신감과 자주성을 엿볼 수 있다.

통일 이후의 신라 사회는 화엄불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때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부석사는 왕경이 아닌 지방에 자리 잡았다. 여기서 새로운 문화적 소양을 싹트게 한 의상의 활동은 지방문화를 배양해 낸 또 다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시기에 부석사는 새로운 문화의 발상지였고, 중심지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통일 시기 신라 왕실은 중앙 관료 조직의 확대 정비와 지방 세력의 개편을 지속해서 추진하여 왕권 강화에 상당한 성과를 이루면서 왕도정치의 구현으로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이처럼 화엄불교는 사상적으로는 종교의 본질을 추구하였고, 원융무애(圓融無碍)의 화엄사상이 삼국통일 과정에 백성들의 민심을 평정하였으며 내면적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의 호국적인 신앙의 역할도 하였다. 이러한 화엄불교의 역할은 통일신라는 물론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그리고 잦은 외침이 있었던 조선시대에도 그 맥이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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