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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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Dynasty |
이칭/별칭 | 조선왕조,조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영주 지역 역사.
[개설]
조선시대 영주는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영천군(榮川郡)·풍기군(豊基郡) 3개 고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작은 고을이었지만 영주는 조선시대 동안 우리나라 선비 문화의 중심지였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지금의 영주 소수서원]이 설립되었으며, 황준량(黃俊良)·박승임(朴承任)·김륵(金玏)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영주 지역 선비들은 학문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선비정신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단종복위운동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임진왜란과 무신난(戊申亂) 때는 우국충정의 정신으로 많은 선비가 의병을 일으켰다.
[연혁]
1413년(태종 13)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고려 말 순흥부(順興府)는 순흥도호부, 영주(榮州)는 영천군, 기주(基州)는 기천현(基川縣)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이 가운데 기천현은 속현(屬縣)으로 은풍현(殷豐縣)을 두고 있었는데, 1450년(문종 즉위년) 은풍현에 문종 태(胎)가 묻혔다고 하여, 풍기군으로 승격하였다. 이렇게 영주 지역에 3개 고을이 형성되었지만 오래가지 못하였다.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 절의를 지키려 했던 순흥도호부의 여러 선비와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시도하다 실패로 끝나는 사건이 발생하여 순흥도호부는 혁파되어 버렸고, 그 영역은 이웃한 영천군·풍기군·봉화군에 분속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영주 지역은 일본군의 침입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고, 죽령이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이와 관련해 『선조수정실록』의 1592년 6월 28일 기사에는 “왜적은 평소 죽령 길이 험하여 넘기가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 … 죽령 아래의 풍기·영천 … 등 여러 고을이 다행히 병화(兵火)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복지(福地)라고 일컬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영주 지역의 뜻있는 선비들은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이 무렵 영주 지역에서 조직된 의병부대의 대장은 김개국(金蓋國), 부장은 이흥문(李興門)이 맡았으며, 김대현(金大賢)·박녹(朴漉)·금복고(琴復古)·김륭(金隆)·박선장(朴善張)·권호신(權虎臣)·장여홍(張汝弘)·장여기(張汝起)·이성백(李成栢) 등이 함께 활약하였다. 당시 김개국 부대는 유격전 및 매복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의 죽령 진출을 방어하였다. 그 외에도 이개립(李介立)·안몽윤(安夢尹)·이정견(李庭堅)·곽진(郭瑨)·권두문(權斗文)·권유선(權有善)·손흥경(孫興慶)·배응경(裵應褧)·성안의(成安義)·황응규(黃應奎)·임흘(任屹)·곽수지(郭守智) 등의 인사가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6세기 후반 이후 사림 정치가 확립되면서 조선 전기 절의 인사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1681년(숙종 7) 단종이 신원되었다. 그 영향으로 1683년(숙종 9) 혁파되었던 순흥도호부가 복설되고 영천·풍기·봉화 등에 분속되었던 옛 영역이 환원되었다.
옛 영주 지역 선비들의 절의정신은 무신난 때 한 번 더 빛을 발한다. 1724년(영조 1) 소론의 급진파 이인좌(李麟佐)와 남인 정희량(鄭希亮) 등에 의해 무신난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영주 지역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순흥도호부 지역에서는 이징도(李徵道)[이휘도(李徽道)]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황우일(黃宇鎰)·박경지(朴敬祉)·서만유(徐萬維)와 의병을 일으켰으며, 영천군에서는 나학천(羅學川)이 대장이 되어, 김정·정옥(鄭玉)·성세욱(成世頊)·장위긍(張緯恆)·송유식(宋儒式)·정일신(鄭一愼)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풍기군에서는 권경렴(權景濂)이 대장이 되어 김주억(金胄嶷)·김태언(金兌彦)·권대경(權大經)·조중정(趙重鼎) 등과 의병을 일으키며 자신들의 절의 정신을 드러내었다.
[행정과 군사]
조선시대 지방 행정 제도는 군현제(郡縣制)를 기본 골자로 하여 각 군현의 읍격에 따라 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으로 나누어졌다. 여기에 파견되는 지방관의 품계도 달랐으며, 파견되는 지방관은 그 지역의 행정권·사법권·군사권을 행사하였다. 조선시대 순흥도호부는 종3품의 도호부사가 파견되었으며, 영천군에는 종4품의 군수가 파견되었다. 풍기군의 경우 기천현 시절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었지만, 1450년 풍기군 승격 후에는 군수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군현제를 기본 골자로 행정구역을 구획한 조선 정부는 고을 하부에 면리제(面里制)를 시행하여 지배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에 1485년(성종 16)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5호(戶)를 1통(統), 5통을 1리(里), 몇 개의 리를 면(面)으로 구성하고, 통에는 통주(統主), 리에는 이정(里正),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면리제는 조선 전기 중앙의 통치력 한계로 일시에 시행되지는 못하고 조선 후기 이후 정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17세기 무렵 영주 지역의 경우 순흥도호부의 방명(坊名)[면 이름]으로는 대평면(大平面)·내죽면(內竹面)·일부석면(一浮石面)·동원면(東元面)·도강면(道講面)·삼부석면(三浮石面)·이부석면(二浮石面)·수식면(水息面)·화천면(花川面)·와단면(臥丹面)·수민단면(壽民丹面)·대룡산면(大龍山面)·창락면(昌樂面), 영천군의 방명으로는 봉향면(奉香面)·망궐면(望闕面)·산이면(山伊面)·가흥면(可興面)·두전면(豆田面)·호문면(好文面)·권선면(權先面)·진혈면(辰穴面)·적포면(赤布面)·어화면(於火面)·천상면(川上面)·임지면(林只面)·말암면(末巖面)·오록면(梧麓面), 풍기군의 방명으로 동부면(東部面)·서부면(西部面)·동촌면(東村面)·생현면(生峴面)·노좌리면(魯佐里面)·와룡동면(臥龍洞面)·상리면(上里面)·하리면(下里面) 등을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지방 군사제도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운영되었다. 진관체제란 지리적 또는 군사적 요충지마다 진관을 설치하여 이 진관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에 따라 영천·풍기·순흥은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의 관할 아래 있었다. 진관체제는 16세기 이후 제승방량 체제로 개편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문제점이 드러나 다시 진관체제로 환원하되,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속오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속오군의 훈련을 위해 각 도에 영장(營將)이 파견되었다. 이에 경상도좌병영에는 안동진(安東鎭)에 전영장(前營將), 상주진(尙州鎭)에 좌영장(左營將), 경주진(慶州鎭)에 후영장(後營將)을 두었다. 순흥도호부·영천군·풍기군은 이때 전영장 관할이었다.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순흥도호부의 토성(土姓)으로 안(安)·이(李)·신(申)·윤(尹), 영천군의 토성으로 민(閔)·우(禹)·예(艾)·팽(彭)·동(董), 기천현의 토성으로 정(鄭)·안(安)·피(皮)·방(邦)·음(陰)·진(秦)·신(辛)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순흥의 토성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호장직을 세습해 오다 고려 후기 안향(安珦)과 안축(安軸) 일가가 차례로 상경 종사하여 신흥사대부로 성장하였다. 이후 순흥안씨는 조선왕조의 전개에 따라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져 갔다. 순흥안씨를 제외한 다른 토성은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 영천의 토성인 영천민씨(榮川閔氏)는 고려 숙종조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수원 최계방(崔繼芳)의 처가 영천민씨였으며, 조선 초 문과로 출사한 민인(閔寅)과 민은(閔誾)은 사림파였다. 한편 우씨(禹氏)는 영천의 호장직을 세습해 왔으며 고려 말 정도전(鄭道傳)의 아버지인 정운경(鄭云敬) 가문과 혼인을 맺게 된다. 이후 이들 봉화정씨(奉化鄭氏) 가문은 처향·외향을 따라 영천에 거주하였다. 풍기 지역은 후삼국시대부터 호장 세력이 강하였고 읍세(邑勢)에 비하여 토성 수가 많은 편이다. 그 중 진씨(秦氏)는 현리(縣吏)에서 사족으로 성장하였는데, 진유경(秦有經)·진담(秦澹) 부자 등 6명이 조선 전기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영주 지역의 토성 세력은 고려 후기부터 사족화가 진행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혼인 범위도 확대되었다. 거기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과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제도를 바탕으로 17세기 무렵까지 다른 지역의 유력한 사족 가문들이 대거 영주 지역에 이거해 오게 된다. 대표적으로 연안김씨(延安金氏) 가문의 김구(金俱)가 영천 원암리(遠岩里)로 이주하였으며, 평해황씨(平海黃氏)인 황준량(黃俊良) 가문이 조선 초 영천에 우거하였다가 다시 풍기 지역으로 옮겼다.
18세기 중반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새롭게 영주 지역으로 이주한 성씨들이 망라되어 있다. 먼저 순흥도호부의 새로운 성씨로는 김(金)·정(鄭)·황(黃)·권(權)·박(朴)·성(成)·금(琴)·홍(洪)·손(孫)·곽(郭)·허(許)·배(裵)·여(余)·류(柳)·강(姜)·조(趙)·전(全)·장(張)·남(南)·송(宋)·오(吳)·정(丁)·심(沈)·변(邊)·서(徐)씨 등이다. 영천군에는 토성 이외에 봉화정씨(奉化鄭氏)·영월김씨(寧越金氏)·정선전씨(旌善全氏)·함창김씨(咸昌金氏)·옥천전씨(沃川全氏)·예안김씨(禮安金氏)·안동권씨(安東權氏)·야성송씨(冶城宋氏)·고창오씨(高敞吳氏)·공주이씨(公州李氏)·풍산김씨(豊山金氏)·경주이씨(慶州李氏)·나주박씨(羅州朴氏)·성주배씨(星州裵氏)·인동장씨(仁同張氏)·한양조씨(漢陽趙氏)·무안박씨(務安朴氏)·영양남씨(英陽南氏)·진성이씨(眞城李氏)·영천이씨(永川李氏)·창원황씨(昌原黃氏)·전주류씨(全州柳氏)·청도김씨(淸道金氏)·연안김씨·청주정씨(淸州鄭氏)·나주정씨(羅州丁氏)·창녕성씨(昌寧成氏)·고령박씨(高靈朴氏)·봉화금씨(奉化琴氏)·의성김씨(義城金氏)·덕수이씨(德水李氏)·수성나씨(壽城羅氏) 등이 주요 성관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 풍기군에는 영월김씨(寧越金氏)·삼척김씨(三陟金氏)·평창이씨(平昌李氏)·흥해최씨(興海崔氏)·성주배씨(星州裵氏)가 새롭게 등장한다.
[인구와 경제]
조선 전기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순흥도호부의 호수(戶數)와 인구수는 284호 1,679명, 영천군이 377호 3,087명, 기천현이 160호 709명, 은풍현이 75호 307명으로 나타난다. 반면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여지도서』에는 순흥도호부가 2,943호 14,091명[남 5,764명, 여 8,327명], 영천군이 3,649호 23,452명[남 8715명, 여 14,737명], 풍기군이 2,401호 10,176명[남 4,304명, 여 5,872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조선 후기 큰 폭으로 인구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전결의 경우 영주 지역이 산간 지역이었던 만큼 비옥한 편은 아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순흥도호부는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2,459결로 논이 7분의 3이라고 하였다. 또 영천군은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추우며, 간전(墾田)이 4,118결로 논이 9분의 3이 넘는다고 하였다. 기천현은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추운 편으로 간전(墾田)이 1,634결로 논이 약간 많다고 하였다. 한편 『여지도서』의 순흥도호부 전결은 한전(旱田) 1,609결 77부, 수전(水田) 1,147결 50부 4속으로 나타나며, 영천군 전결은 한전 1,975결 78부 1속, 수전 1,232결 10부 9속, 풍기군 전결은 한전 1,259결 32부 5속, 수전 960결 68부 2속이라고 하였다.
한편, 순흥도호부·영천군·풍기군의 토산물로는 벼·기장·조·콩·보리·메밀·뽕나무·왕골[莞]·신감초(辛甘草)·송이버섯·석이(石茸)·느타리[眞茸]·산겨자[山芥]·은구어(銀口魚)·수정석(水晶石)이 있다. 그리고 꿀·밀[黃蠟]·칠·종이·자리[席]·호랑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삵가죽·돼지가죽·인삼·석이버석·송이버섯·잣·지초를 정기적으로 진공(進貢)하였다. 조선 후기 토산물로는 종이[紙]·잣[海松子]·송이·은구어·지황(地黃)·복령(茯苓)·왕골[莞草]·인삼·벌꿀·석이버섯 등이 있다. 진공품으로는 인삼·청밀(淸蜜)·포황(蒲黃)·단건치(單乾雉)·생노루[生獐]·산꿩[生雉]·만화석(滿花席)·황화석(黃花席)·채화석(彩花席)·별문석(別紋席) 등이 있었다.
[교통과 통신]
조선시대 역(驛)은 육상 교통로에 위치하여 공문서 및 군사정보 전달, 관원에 대한 숙박 제공, 역마(驛馬)의 공급, 관물(官物) 수송 등을 돕는 기관이었다. 조선시대 동안 41개의 역도(驛道)에 총 480여 개의 역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영주를 지나는 역도는 창락도(昌樂道)로 창락역(昌樂驛)·죽동역(竹洞驛)·창보역(昌保驛)·평은역(平恩驛)이 설치되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창락역은 순흥-영천-예안-예천-안동으로 이어지는 창락도의 중심역으로 순흥도호부 서쪽 30리에 있었고, 죽동역은 순흥도호부 남쪽 10리, 창보역은 영천군 서쪽 9리, 평은역은 영천군 동쪽 28리에 각각 위치하였다. 이 가운데 창락역에는 역도 관리를 위해 처음에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 파견되다가, 이후에는 종6품의 찰방(察訪)이 파견되었다.
원(院)은 역과 역 사이에 있었던 숙박시설로 관원과 여행객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전기 영천군의 원으로는 효대원(孝大院)·문수원(文殊院)·금림원(金林院)·승리원(乘利院)·가이원(加耳院)·장금원(長金院)·덕산원(德山院)·철겸원(鐵鉗院)이 확인되며, 풍기군의 원으로는 남원(南院)·산요원(山腰院)·창락역남원(昌樂驛南院)·순지원(蓴池院)·인빈원(寅賓院)이 확인된다. 반면, 조선 후기가 되면 사회·경제적 변화로 대다수 원이 혁파되고 사설 주막과 주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된다. 이에 『여지도서』에는 가이원·산요원·창락역남원만이 1683년 복설된 순흥도호부 소속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 영주 지역에 설치된 군사 통신 시설로는 봉수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전반 영주 지역에는 순흥도호부의 죽령산(竹嶺山) 봉수, 영천군 소이산(所伊山) 봉수, 기천현의 망전산(望前山) 봉수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군 편에는 기존의 소이산 봉수 대신 성내산봉수가 나타나, 15세기 후반 이후 봉수의 위치가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풍기군 편에는 죽령 봉수와 망전산 봉수가 확인된다. 망전산 봉수는 순흥도호부 혁파 후 풍기군 관할로 이속되었던 것이다. 또 『재향지(梓鄕誌)』에는 순흥도호부에 사랑당(沙郞堂) 봉수, 『여지도서』 영천군 편에는 창팔래산(昌八來山) 봉수가 새롭게 확인되는데, 두 곳 모두 임진왜란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학문과 사상]
영주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의 고향이자,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위치한 곳이다. 이에 풍기군수 주세붕은 1543년(중종 38) 안향을 제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였다. 1550년(명종 5)에는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소수서원은 이후 조선시대 사림들의 공론을 이끄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황은 영주 출신은 아니지만, 영주 지역이 처향(妻鄕)이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하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1558년(명종 13) 영천군수 안상(安瑺)은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건립할 때 이황에게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이황의 문하에서 황준량과 박승임 등이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각각 풍기와 영천을 대표하는 학자로 이후 영주 성리학의 중흥을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16세기 이후 영주 지역 성리학은 이황을 중심으로 크게 일신되었으며, 이후에는 서원을 중심으로 사승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에 현재까지 확인되는 옛 순흥 지역의 서원으로는 구고서원(九皐書院)·구만서원(龜灣書院)·단계서원(丹溪書院)·도계서원(道溪書院)·문산서원(文山書院)·소수서원·용연서원(龍淵書院)·행계서원(杏溪書院)이 있으며, 옛 영천 지역의 서원으로는 귀강서원(龜江書院)·구산서원(龜山書院)·구호서원(鷗湖書院)·방산서원(方山書院)·사계서원(泗溪書院)·산천서원(山泉書院)·삼봉서원(三峯書院)·오계서원(汚溪書院)·오산서원(梧山書院)·오천서원(梧川書院)·운곡서원(雲谷書院)·의산서원(義山書院)·이산서원·장암서원(壯巖書院)·한천서원(寒泉書院)이 있다. 또한 옛 풍기 지역의 서원으로는 노계서원(魯溪書院)·우곡서원(愚谷書院)·욱양서원(郁陽書院)이 있는데, 이 가운데 소수서원과 이산서원은 사액서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