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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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牧使善政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황향주 |
소재지 | 양주목사 선정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2동 주민 센터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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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선정비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를 관할하던 양주목사로서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양주목사 선정비(楊州牧使善政碑)는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노원구·중랑구·강북구 및 경기도 양주시·동두천시 등을 포괄하던 조선 시대 양주(楊州) 지역에서, 양주목사(楊州牧使)로서 선정(善政)을 베푼 관리들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를 가리킨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관(地方官)으로서 선정을 베풀던 관리가 중앙관(中央官)으로 임관(任官)하거나 다른 지방으로 전보(轉補)할 경우 백성들이 비(碑)를 건립하여 해당 관리를 송덕(頌德)하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비를 선정비(善政碑)·송덕비(頌德碑)·또는 유애비(遺愛碑)라고 일컫는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일대를 포괄하였던 조선 시대 양주에서는 정대년(鄭大年)·백인걸(白仁傑)을 비롯한 20명의 목민관(牧民官)을 기리기 위하여 양주목사 선정비가 건립되었다. 이 가운데 16기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양주 관아 터에 군집해 있으며, 나머지 4기가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2동 주민 센터 입구에 있다. 비의 건립 시기는 16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중에서도 숙종(肅宗) 대에 만들어진 것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16~17세기의 선정비]
16~17세기에 건립된 선정비로는 목사 정대년 추모비(牧使鄭大年追慕碑), 목사 백인걸 선정비(牧使白仁傑善政碑), 목사 이단석 선정비(牧使李端錫善政碑), 목사 남용익 불망비(牧使南龍翼不忘碑), 목사 유념 불망비(牧使柳淰不忘碑)가 있다. 목사 정대년 추모비는 정대년 사후 만들어졌던 비를 1613년(광해군 5)과 1644년(현종 5)에 고쳐 세웠다. 목사 백인걸 선정비와 목사 이단석 선정비는 각각 1567년(선조 1)과 1682년(숙종 8)에 건립하였다. 그 밖에 목사 남용익 불망비는 1660년(현종 1)에, 목사 유념 불망비는 1649년(효종 1)에 만들어졌다. 현전하는 5기의 16~17세기 선정비는 모두 양주 관아 터에 위치한다.
[18세기의 선정비]
양주시 유양동 양주 관아 터에는 18세기 건립된 총 10기의 양주목사 선정비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8기가 숙종 대에 제작되었고, 그중에서도 4기는 1701년(숙종 27)에 세워졌다. 목사 이유 선정비(牧使李濡善政碑), 목사 이형상 선정비(牧使李衡祥善政碑), 목사 박신 선정비(牧使朴紳善政碑), 목사 유이복 유방비(牧使柳以復流芳碑)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외에 1704년(숙종 30) 목사 이천근 선정비(牧使李天根善政碑), 1705년(숙종 31) 목사 윤지인 선정비(牧使尹趾仁善政碑)가 만들어졌으며, 1716년(숙종 42)에 목사 이진검 불망비(牧使李眞儉不忘碑)와 목사 권민 선정비(牧使權愍善政碑)가 건립되었다.
양주 관아 터에 남아 있는 18세기의 선정비 가운데 숙종 대에 제작되지 않은 것으로는 목사 유척기 불망비(牧使兪拓基不忘碑)와 목사 이완 불망비(牧使李浣不忘碑)를 들 수 있다. 전자는 1729년(영조 5)에 건립한 것이며, 후자는 1643년(인조 21)에 제작한 것을 1723년(경종 3)에 고쳐 세운 것이다. 한편,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2동 주민 센터에서는 18세기의 선정비를 1기 더 찾아볼 수 있는데, 목사 이여적 불망비(牧使李汝迪不忘碑)라고 명명되는 이 비는 1732년(영조 8)에 양주목사로 부임하였던 이여적(李汝迪)을 송덕하기 위하여 양주 백성들이 1735년(영조 11)에 만들었다고 한다.
[19~20세기의 선정비]
19세기 이후 건립된 선정비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는 목사 조규년 선정비(牧使趙奎年善政碑), 목사 임한수 선정비(牧使林翰洙善政碑), 목사 이봉의 선정비(牧使李奉儀善政碑), 군수 홍태윤 선정비(郡守洪泰潤善政碑)가 있다. 총 4기의 19~20세기 선정비 중 목사 조규년 선정비를 제외한 3기는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2동 주민센터 입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이목을 끄는 비는 군수 홍태윤 선정비이다. 다른 비들과 다르게 군수 홍태윤 선정비에서는 ‘목사’가 아닌 ‘군수’라는 직함이 사용되고 있어, 이를 통하여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양주가 행정적으로 재편(再編)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홍태윤은 1902년(고종 39)부터 고종이 퇴위한 1907년까지 양주 군수를 역임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양주 목민관이었다.
[도봉구 소재 선정비]
이여적 선정비의 앞 면에는 ‘목사 이공 여적 영세불망비(牧使李公汝迪永世不忘碑)’, 뒷면에는 ‘옹정 십삼년 을유 정월 일 립(雍正十三年乙卯正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옹정 13년은 1735년(영조 11)으로 이여적이 1732년 양주목사가 되었다가 1735년에 이임하면서 백성들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임한수 선정비는 ‘목사 임공 한수(牧使林公翰洙)’라고 씌여져 있다. 임한수는 1864년(고종 1) 3월부터 1869년(고종 6) 6월까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양주목사를 역임했다. 이봉의 선정비에는 ‘목사 이공 봉의 애민 선정비(牧使李公奉儀愛民善政碑)’라고 씌여져 있다. 이봉의는 1869년(고종 6) 5월 2일부터 5월 16일까지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홍태윤 선정비에는 ‘군수 홍공 태윤 애민 선정비(郡守洪公泰潤愛民善政碑)’, 후면에는 ‘연 계묘 삼월 일 립(年 癸卯三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계묘년는 1903년으로 홍태윤이 양주 군수로 재직 중 선정비가 세워진 특이한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