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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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大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강산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원대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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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원대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
출생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활동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원대현(元大鉉)[?~?]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에 대한 소식은 원대현이 살던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월산교회에도 전하여졌다. 1907년 건립된 월산교회는 부설 교육기관이었던 배인학당과 함께 당시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3·1운동 관련 소식을 접한 월산교회의 기독교인들인 김필규(金弼圭), 이인하(李麟夏), 이택주(李宅周), 김우동(金愚東) 등은 마을의 유지인 이달용(李達鎔), 이승보(李承輔), 이재하(李載夏), 이택주(李宅周), 유인명(柳寅明), 홍순철(洪淳哲), 윤태익(尹泰益) 등과 함께 협의하여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18일 월산교회에 모여 회합하려던 것이 일본 경찰에 의하여 사전 발각되어 1919년 3월 16일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李澤夏)가 검거되었다.
이에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와 답내리] 일대의 주민 200여 명이 모여 횃불을 들고 모란고개를 넘어 면사무소가 있는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의 헌병 주재소로 몰려갔다. 군중들은 검거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헌병 주재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날의 시위는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의 주민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화도면 마석우리에 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한 점에 주목하여 ‘마석우리 시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위 참여 인원이 가장 불어난 새벽 시점에는 1,000여 명에 달하는 등 급격하게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고 분위기도 격앙되었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총에 맞은 이달용, 손복산(孫福山)[1889~1919], 신영희(申榮熙),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은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원대현을 비롯하여 강덕여(姜德汝), 윤균(尹均), 윤정석(尹丁石), 이재혁(李載赫) 등이 중상을 입었으며 1919년 3월 19일 새벽에는 김필규를 비롯하여 강선원(姜善遠), 윤준(尹俊), 김원석(金元石) 등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상훈과 추모]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화도면 월산리 3·1운동에 참여한 원대현 등의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3년 설립한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원대현을 비롯하여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추모하고자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