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45 |
---|---|
한자 | 燕岐大捷 |
영어공식명칭 | Battle of Yeong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상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291년(충렬왕 17) 5월 - 연기대첩이 연기현의 정좌산 중심으로 전개 |
---|---|
종결 시기/일시 | 1291년(충렬왕 17) 5월 - 금강변 추격전 |
발생|시작 장소 | 정좌산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
종결 장소 | 금강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금강변 |
성격 |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
관련 인물/단체 | 한희유|김흔|고려군|원나라 원군|합단|합단적 |
[정의]
1291년 세종 지역 정좌산 일대에서 원나라 반란군인 합단적을 물리친 전투.
[역사적 배경]
침략의 원인은 원나라 내부의 황위 계승전에 있었다. 즉 1259년 몽고제국의 헌종[몽케]이 사망하자 동생들인 쿠빌라이[忽必烈]와 아리크부카[阿里不哥]가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황위에 올라 세조가 되었다. 그리고 1271년 국호를 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리크부카와 아리크부카 동조자들은 쿠빌라이에게 항거하였다. 합단(哈丹)이란 인물도 그 동조자 중 하나였다. 합단은 칭기즈칸 동생의 후손이었다.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손자 티무르[帖木兒, 뒤의 成宗]에게 아리크부카 등 반란군에 대한 정벌을 명령하였다. 쿠빌라이는 “고려로 도망한 것은 실수다. 고려는 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오히려 이기지 못한 나라이다. 또 우리 왕조가 창건된 초기에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왕조에서 정벌하였으나 역시 쉽사리 이기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조그마한 도적을 무서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경과]
각지에서 정벌군에게 패배한 몽고 합단의 무리는 두만강 쪽으로 도망하였으며, 지구전 양상으로 1290년(충렬왕 16) 초 고려의 동북 변경으로 넘어 들어왔다. 1291년(충렬왕 17)에는 합단적(哈丹賊)이 쌍성총관부 지역을 거쳐 화주(和州)·등주(登州) 등을 함락시키고 철령(鐵嶺)을 넘어 고려의 중부 내륙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양근성(陽根城)[경기도 양평]을 함락시키고 원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4월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가 원주에서 합단적과 싸워 58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충주에서는 충주 산성별감(忠州山城別監)이 합단적을 격파하고 적의 머리 40급을 바쳤다.
추격전이 계속되자 이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충청남도 지역으로 넘어 들어왔다. 금강 연안까지 합단적이 침입해 왔을 때 고려 장군 한희유(韓希愈)와 원나라 장수 설도간(薛闍干) 등이 합단족과 맞붙은 전투가 정좌산(正左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결과]
연기대첩은 1291년 5월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전투는 연기현(燕岐縣)의 정좌산 근처에서 벌어졌고, 2차는 금강변 추격전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 원나라 원군은 개경에 당도하여 있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3군을 편성하여 원군과 연합작전을 개시하였다. 3군은 인후(印侯)가 거느린 중익군(中翼軍), 한희유(韓希愈)가 거느린 좌익군(左翼軍), 김흔이 거느린 우익군(右翼軍)이었다. 중익군 등 3군은 합동 작전을 개시하여 합단적을 크게 무찔렀다.
[의미와 추모]
168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 『동여비고(東輿備考)』 중 「충청도오죽령이북제주군도(忠淸道烏竹嶺以北諸州郡圖)」에는 세종 지역의 원수산과 정좌산에서 한희유 장군이 합단을 패퇴시켰다고 덧붙여 적었다. 연기대첩은 우리나라 7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연기대첩에 관한 기사는 『고려사절요』, 『고려사』 등 사서와 『세종실록지리지』 등 지지(地誌)에도 기록되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고려시대 대몽항쟁 전투인 연기대첩에서 전사한 우리 선조들의 넋을 위로하는 문화행사인 ‘연기대첩제’를 2000년부터 매년 10월 연기대첩비공원에서 지내 왔다. 2019년부터는 호국보훈의 의미를 더 깊이 새기고자 연기대첩의 마지막 항전에서 승리한 달을 기념해 ‘연기대첩제’를 6월에 개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