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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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城 |
영어공식명칭 | Iseong |
이칭/별칭 | 이성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백영종 |
조성|건립 시기/일시 | 삼국시대 - 이성에 선조문이 시문된 기와 조각이 많이 남아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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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9년 12월 29일 - 이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12월 31일 - 이성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4호로 재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7년 - 이성에 대한 현황 조사가 실시됨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이성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이성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산26 일원 |
원소재지 | 이성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산26 일원 |
성격 | 산성 |
양식 | 테뫼식 |
관련 인물 | 이도 |
크기(높이,길이,둘레) | 둘레 790m|폭 2m|높이 2~5m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세종특별자치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이성산 정상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 산성.
[개설]
이성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성산(李城山)[240m]에 자리하고 있다. 이성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형태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남쪽에 위치한 금성산(金城山)[424.1m]에서 북쪽 작성산(鵲城山)[338.8m]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마지막 산자락 정상에 있다.
[건립 경위]
이성에 대한 기록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의현 고적조에 “이성은 운주산인 지금의 작성산 북쪽에 석축성으로 고려 초기 인물인 이도가 거주하였으며, 둘레가 1,184척이고 성내에 우물이 하나 있었으나 16세기에 이미 폐성되었다.(李城 在雲住山北峰 石築 世傳李棹故居 其中寬敞 周一千一百八十四尺 內有一井 今廢)”라고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24 전의현 성지조에는 “고려시대 이도가 여름에는 성내의 북쪽에서 겨울에는 남쪽에서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단지 성의 정상에 이태사의 유허비만 남아 있을 뿐이다.(在李城山 山頂平廣 中有平壇 麗朝太師李棹所居有基 嘗增之南北各置一亭 冬 則居南 夏則居北亭云)”라 기록하고 있다.
[위치]
이성은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의 이성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이성은 기존의 문헌 기록을 통하여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된 고대산성으로 추정된다. 2017년에 이성에 대한 현황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성벽 둘레는 하단을 기준으로 584m, 폭은 2m이다. 구간에 따라 석축 및 토석혼축의 축조 방식이 확인되었다. 즉 남쪽 성벽은 석축, 북쪽 성벽과 동쪽 성벽 일부는 토석혼축의 내탁식으로 축성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성벽이 대부분 붕괴되어 정확한 성벽의 축조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산성과 관련된 부대 시설로는 문지와 건물지가 남아 있다. 문지는 동문지와 남문지가 남아 있고 서벽쪽에도 문지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 성벽을 통과하는 등산로와 지형 조건으로 보아 문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만 될 뿐이다. 건물지는 성내 곳곳에 남아 있다. 평탄 대지는 모두가 건물지로 판단되는 가운데 13곳에서 이와 같은 흔적이 확인된다. 특히 전체적으로 성내 지형이 북고남저형을 이루고 있는 만큼 남벽 안쪽에는 넓은 평탄면이 남아 있다. 위치로 보아 원래는 저수시설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수구지도 2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지표조사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성내에 우물이 1개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이성은 이성산 정상부의 8부 능선을 감싼 테뫼식 성이다. 남성벽, 동성벽과 서성벽 일부 구간은 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성이지만 북성벽과 서성벽 일부는 내탁식 토석혼축성으로 보인다. 성내에서는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미 폐성이 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되었고, 선조문(線條文)[실처럼 가는 선 무늬]이 시문된 기와 조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없으나 지정학적인 여건으로 보아 천안에서 공주로 가는 교통로가 한눈에 조망되는 지점에 이성이 위치하고 있어 고대에 교통로를 방비하기 위한 길목 방어 목적 아래 축조된 산성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