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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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峙嶺說話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진오 |
[정의]
세종 지역의 언덕이나 고개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세종 치령설화의 특징]
세종특별자치시의 마을들은 산천을 끼고 있기 때문에 마을 길목에 언덕과 고개가 많은 편이다. 그 때문에 고개와 관련한 지명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설화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유래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지역별 치령설화는 조치원읍의 「도장고개」와 「병고개」, 금남면의 「남곡고개」·「당마고개」·「길제고개」·「돌다리고개」·「분홍고개」·「허무니고개」·「여수고개」, 남면의 「고마니고개」, 동면의 「엉고개」 등이 확인된다.
치령설화의 경우 금남면에서 비중 있게 채집된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치령설화는 역사적인 특정 인물을 다루기보다는 주로 세종 지역에 살았던 민중들의 삶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종의 주요 치령설화]
「허무니고개」는 조치원읍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유래담이다. 옛날 지독한 자린고비[매우 인색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가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가 자린고비의 장독대에 앉아 된장이 다리에 묻힌 채 달아났다. 행주를 들고 파리를 쫓아 달리던 자린고비는 고개에서 넘어져 파리를 놓치게 된다. 파리도 놓치고 땅에서 구른 자린고비는 허무하다고 탄식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자린고비가 넘어진 고개를 ‘허무니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고마니고개」는 남면 나성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에 있는 고개에 전해지는 지명유래담이다. 삼국시대 당시 나성리에는 외아들을 둔 다섯 집이 있었다고 한다. 다섯 아들은 나당 연합군과 백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소집되었다. 다섯 아들은 마을의 고개를 지나 전쟁터로 나갔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백제 또한 패망하였고, 전쟁은 끝이 났다. 외아들을 싸움터에 보낸 후 마을의 부모들은 밤마다 산신께 기도 드리며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나간 다른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와도 마을의 다섯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부모들도 죽고 말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다섯 아들이 고개를 넘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모든 것이 그만’이라는 뜻으로 고마니고개라 불렀다고 전한다.
「엉고개」는 동면 내판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내판리]에 있는 고개에 전해오는 지명유래담이다. 조선시대 당시 마을에는 부지런하고 금슬 좋은 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부부는 아들을 소원하며 임신하였지만 일을 하던 아내가 유산하고 말았다. 남편은 아내에게 몸조심하기를 당부하지만 아내는 계속 남편의 일을 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남편은 왜적과 싸우다가 양평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아내는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는데 마침 몸에 태기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굳게 마음먹고 피란을 떠나지 않은 채 마을에 남았다. 이윽고 왜군이 마을까지 쳐들어왔고, 아내는 왜장[일본 장수]에게 끌려갔다. 왜장은 아내를 탐하여 외진 바위로 이끌려갔다가 은장도에 찔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내는 그 뒤로도 왜장 여덟을 유인하여 모두 죽였다. 결국 아내는 왜장들을 살해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왜장을 더 죽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죽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은 후 내판리의 고개에서는 매일 밤 울음소리가 들렸고, 이후 사람들은 고개를 엉고개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