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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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兆年 |
영어공식명칭 | I Jonyeon |
이칭/별칭 | 원로,매운당,백화헌,성산군,문열공,성산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명진 |
[정의]
고려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字)는 원로(元老), 호(號)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시조 이순유(李純由)의 13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돈문(李敦文)이고, 할아버지는 이득희(李得禧)이고, 아버지는 이장경(李長庚)이다.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감찰대부 정윤의(鄭允宜)의 딸이다. 외아들은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1373년]이다. 손자는 이포의 아들 일곱인데, 이름이 알려진 손자는 여섯이다. 알려진 순서는 이인복(李仁復), 이인임(李仁任), 이인미(李仁美), 이인립(李仁立), 이인달(李仁達), 이인민(李仁敏)이다. 이인복은 고려와 원나라의 과거에 각각 합격하여 이름을 높이었고, 이인임은 고려 말에 크게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인미는 판서(判書)를, 이인립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이인달은 주부(注簿)를, 이인민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각각 지내었다. 조카는 이승경(李承慶)이다.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이조년(李兆年)[1269~1343] 대부터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명문가로 변모하였다.
[활동 사항]
이조년은 경산부(京山府)[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이조년은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 시기를 이조년의 묘지명에서는 17세라 하였고, 『고려사(高麗史)』 이조년 열전에서는 26세인 1294년(충렬왕 20)이라 하였다. 충렬왕 대에 향공 진사(鄕貢進士)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로 임명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충렬왕, 충숙왕, 충혜왕에 이르기까지 충성스럽고 강직한 신하로서 명성을 남겼다.
1306년(충렬왕 32)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그러나 이때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그 후유증으로 이조년은 유배를 갔다가 고향 경산부로 돌아와서 13년을 지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된 지 5년이 된 1325년(충숙왕 12)에 이조년이 단신으로 원나라에서 가서 충숙왕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이에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왔으며 이조년은 감찰장령(監察掌令), 전리총랑, 판전교사, 군부판서(軍簿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여러 차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원나라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적에도 이조년은 충심을 다하였다. 충혜왕이 1339년 복위한 후 이조년에게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대제학(藝文大提學)의 벼슬을 주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충혜왕이 자신을 시종한 공을 기려 이조년을 일등 공신에 책봉하고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하지만 이조년은 충혜왕이 국사에 소홀함을 한탄하며 고향 경산부로 돌아와 1343년(충혜왕 복위4)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조년은 현재도 많이 읽는 고시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를 남겼다. 이 시조를 「다정가(多情歌)」라 부르기도 한다. 봄밤의 정서를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표현하였다. 또한 고려 시대 시조 중에서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 밖에 이조년은 매 사육서인 『응골방(鷹鶻方)』이라는 저서도 남겼다.
[묘소]
이조년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묘는 고향 부동(釜洞)에 있다고 하였다. 그 위치가 현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흑수 마을이라고 한다.
[상훈과 추모]
고려 공민왕은 이조년의 공로를 기려 성산후(星山侯)를 추증(追贈)하고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열공(文烈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