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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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박형순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토기·자기·기와 등을 굽는 가마가 있던 터.
[개설]
도자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각 도자기에는 해당 시기의 문화와 일상생활의 패턴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왔다. 따라서 각 시기에 제작된 도자기들의 양식과 시기별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서 과거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시기에 따라 생활 문화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각 시기에 제작된 도자기와 가마터는 각종 문헌 사료들과 함께 과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활용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도자 문화]
서산 지역의 도자 문화는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 역사와 함께 변화하고 발전하였는데, 특히 오사리 점골 청자 가마터는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가마나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가마와 같은 초기 청자 가마의 양상을 보이고 있어, 초기 청자 제작 전통이 서산 지역에도 함께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사리 점골 청자 가마터에서는 통형 갑발을 비롯하여 가마의 벽체를 구성하고 있던 벽돌, 그릇 내저면이 완만한 곡선 형태를 이루는 선해무리굽 청자와 중국식 해무리굽 청자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들은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나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가마에서 확인되는 것들과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특히 청자 가마터 주변에서 확인되는 벽돌은 당시 이 가마의 벽체가 벽돌로 구축된 것임을 말해 준다. 벽체를 벽돌로 구축한 가마[塼築窯]는 바로 중국 월주요(越州窯)의 영향을 받은 고려 초기 청자 가마의 한 형태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초기 청자 제작 기술의 도입과 제작 양상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인 오사리 점골 청자 가마터는 일부 도자 사학계에서만 그 중요성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며, 현재 유적은 공동묘지 조성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 시대의 도자 문화]
조선 시대 서산 지역의 도자 문화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 320여 개소의 도기소(陶器所) 및 자기소(磁器所)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이들 도기소와 자기소 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도기와 자기를 공급하는 동시에 궁궐 내에서 필요로 하는 내용(內用), 국용(國用)의 생활 용기들을 공납(貢納)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서산군에는 군의 북쪽 사기동(沙器洞)에 하품의 자기소 1개소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작성 당시의 자기소가 어디인지는 현재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았지만, 서산 내에도 집단 자기 제작지가 존재하고 있었고, 여기서 일정 부분의 공납용 자기를 생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의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와 같은 자기소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옛 지명을 통해 조선 후기 서산군 내에 각종 가마 또는 도자기 판매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 나오는 군의 남쪽 화변면(禾邊面), 사점리(沙店里), 마산면(馬山面), 사장리(沙場里), 군의 서쪽 문현면(文峴面), 항점리(缸店里), 군의 북쪽 지곡면(地谷面), 고수철리(古水鐵里), 성연면(聖淵面), 사장리(沙場里)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사기, 옹기, 철기 등을 생산하고 판매하였던 곳과 관련된 지명으로 일부 지역은 현재까지 확인되지는 않으나 가마터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들이다.
[가마터 집중 분포 지역]
현재까지 진행된 지표 조사를 통해 서산 지역 내에서 가마터가 확인된 지역을 정리하면 운산면, 팔봉면, 지곡면, 부석면의 네 곳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1. 운산면 지역
서산시 운산면 가좌리, 소중리, 수평리, 고산리 일원으로 고풍저수지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자 가마들이다. 대체로 조선 후기 백자들이 주로 확인되면서 일부 소지명에서 사기장골, 사기점터, 질티[粘土峙] 등과 같은 관련 지명들이 확인되는 곳이다. 『여지도서』 기록이나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인근에서 기와 가마, 야철지 등이 함께 확인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 서산군의 중요한 수공업 생산 중심지로 판단된다.
2. 팔봉면 지역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어송리 일대로 조선 시대 백자 가마가 집중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지역은 고려 시대 영풍창(永豊倉)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며, 조선 시대 서산군의 주요 교통로 중 하나로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잇는 굴포운하를 조성하려고 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어송리 곧우실 주변의 옛 지명이 사기점골로 불리고 있어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군의 북쪽 사기동 하품 자기소’로 짐작되는 지역이다.
서산시 지곡면 무장리, 연화리와 성연면 오사리 일대이다. 특히 무장리 가마터의 경우 서산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정식 학술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조선 전기 분청사기 가마와 18세기 백자 가마 흔적이 확인된 곳이다. 서산시 팔봉면 일대의 가마군과 더불어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군의 북쪽 사기동 하품 자기소’로 유력시되는 곳이다. 그러나, 현재 무장리 일원은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대대적인 형질 변경이 이루어져 있으며, 1997년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15세기 후반의 분청사기 가마만이 유일하게 발굴 보고서 자료로 남아 있을 뿐이어서 이 지역에서 15세기 전반의 도자기 제작 양상은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서산시 지곡면 무장리의 서쪽에 위치한 연화리와 오사리 일대에서도 조선 후기 백자 가마들이 확인되는데, 특히 오사리 주변의 지명에 윗사장골[上沙場谷], 아랫사장골[下沙場谷], 사동(沙洞) 등으로 확인되고 있어 『여지도서』 제작을 전후한 시기에 이 일대가 사기 제작의 중심지 중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부석면 지역
서산시 부석면 창리, 칠전리 일대의 백자 가마 집중 분포 지역으로 서쪽으로 태안반도를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아직 정식 발굴 조사가 진행된 바 없어 구체적인 유적 현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조선 후기 서산의 서부 및 태안반도 일대에 일상용 백자를 공급했던 가마터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4개소의 가마터 집중 분포지역들의 시기적 선후 관계 및 제작 양상을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기는 어려우나 앞으로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조선 후기 서산 사람들의 일상생활 및 수공업 전개 양상, 수공업 생산품 유통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