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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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영어의미역 | History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욱 |
[정의]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라남도 순천 지역의 역사.
[고대]
순천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소국이 나타난 것은 삼한 시대부터이다.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불운국(不雲國), 초리국(楚離國)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남북국시대까지의 순천의 역사 중 특이하고 의미가 있는 것은 임나사현(任那四縣)[사타·모루·상다리·하다리]과 관계이다.
순천 지역이 삼국 중 어느 나라에 속했는가를 문헌 자료 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백제의 감평군[무평군, 혹은 삽평군]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이다. 순천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백제 성왕 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백제가 군을 설치한 것이 백제 성왕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천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백제에 편입되기 이전 순천 지역에 독자적인 지역연맹체의 형성 여부, 신라나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몇 가지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순천 성산리 목곽묘에서 출토된 고배(高杯)와 호(壺), 순천 운평리 목곽묘의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 순천 용당동과 죽내리의 석곽묘 고배와 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 등은 모두 소가야계의 토기들이고, 대체로 5세기 전반에서 5세기 후반의 것들로 편년되고 있다. 특히 순천 운평리 목곽묘에서 출토된 수평구연호는 서부 경남의 출토품과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같다. 이를 보면 5세기 전반에서 후반까지 순천 지역은 일시적으로나마 소가야연맹체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6세기 전반으로 가면 출토유물이 달라지고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대체로 대가야계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운평리 유적이다.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는 3차에 걸쳐 운평리 고분군을 발굴 조사하였다. 순천 운평리 고분군은 백제가 전남동부권을 장악하기 직전인 기원후 5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순천 지역 지배층의 무덤이다.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것들로 대가야계 금귀걸이와 마구류(馬具類), 가야계 토기와 큰 칼, 옥 등 이 출토되었다. 1·2차 조사 당시 출토유물도 3차 발굴조사와 유사해 대가야계 토기류, 장신구, 마구류가 주류를 차지했다.
이 조사 결과는 두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 번째는 5세기 전반까지 소가야와 관련을 맺던 순천 지역이 5세기 후반에는 대가야 중심 후기 가야연맹이 소속국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5세기 초 이후 낙동강 하류 지역은 신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가야제국은 섬진강을 통해 대외교역을 하였다. 때문에 대가야가 이쪽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섬진강 동안보다는 섬진강 서안 쪽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다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순천 지역이 영산강 유역이나 경남 서·남부 지역과 달리 5세기경까지 독자적으로 지역연맹체를 형성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대가야계 세력이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가야계와 현지 토기 양식이 공존하는 것은 대가야의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가야 중심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치권이 보장된 지역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는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라는 점이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일본의 야마토[大和]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임나’는 가야를 일컫는다. 그리고 『일본서기』 계체기 6년(512)조에 ‘임나사현을 백제에 양도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자료를 뒤집어보면, 백제가 차지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임나의 영역이었다는 의미이다. 한때는 임나사현을 다른 지역에 비정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임나사현을 전남 동부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임나사현 중에서 사타국은 지금의 순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점자 인정되고 있다.
때문에 운평리 고분군은 사타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운평리 고분군에서 일본계 토기나 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고, 대가야계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임나사현은 임나일본부와 무관한 가야와 관련 있는 네 지역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나아가 임나일본부가 일본의 지배 기구였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순천의 역사는 지역 호족 세력의 위상과 결부되어 잦은 읍격(邑格)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순천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지금의 순천 송광사로 내려와 수선사를 만들고, 이를 통해 고려 불교의 개혁과 중흥을 이뤘다는 점이다.
순천은 보조국사 지눌이 결성하고 활동했던 곳이었다. 지금의 순천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를 결성하고 만든 수선사가 명칭을 바꾼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 후기 순천은 고려 불교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무신란 이후 무인집권자들은 문벌귀족 및 그들과 밀착된 교종불교 세력을 억압하여 거세한 다음, 자기 세력 기반으로 그동안 교종세력에 눌려 지방의 산중에서 명맥만을 유지해왔던 선종 세력에 눈을 돌렸다. 무인들이 산중에 전해오는 선종계 절을 구입하여 중흥시키는 것이 사회 일반의 분위기였다. 고려 후기가 되면 무신정권 밑에서 길러져서 다시 등장하는 문신들이 불교의 결사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수선사나 백련사도 이러한 시대적 추세 속에서 결성되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거조사에서 1190년 ‘정혜결사문’을 반포함으로써 정혜사를 결성하였다. 그런데 거조사는 너무 좁아 여러 사람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지눌은 문제(門弟)인 수우에게 적당한 곳을 찾게 하였고, 마침 송광산[조계산]에서 한 폐사를 찾아냈으니 그것이 곧 길상사(吉祥寺)였다.
지눌은 송광산으로 정혜사를 옮겨와 결성하였는데, 마침 그 이웃에 또 다른 정혜사가 있었다. 그래서 지눌은 정혜사를 수선사로 고쳤다.
고려 문벌 귀족 체계와 결탁된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앙결사였던 수선사는, 문벌귀족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서서히 성장해 온 지방사회의 향리층은 물론 이들과 이해가 일치하는 신흥독서층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수선사가 표방한 불교의 새로운 경향은 널리 지방에 소재한 사찰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불교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정(定)[Samādhi]과 혜(慧)[Prajnā]를 함께 닦자는 실천운동이었다. 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이다. 돈오는 인간의 본심을 깨달아 보면 제불(諸佛)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돈오라고 하며, 비록 돈오하여도 습기는 갑자기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점수라는 종교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고려 불교사에서 기본적 과제였던 선교 통합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
수선사의 성립은 선교 일치의 완성, 간화선의 선양이라는 불교사상적인 의미와 실천불교로서의 임무를 완성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로써 수선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대 불교계 혁신운동의 중심체였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사의 큰 흐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순천의 역사에서 특별한 사건은 김굉필(金宏弼)의 유배와 정유재란 때 벌어진 왜교성전투이다. 김굉필의 유배는 순천 지역 성리학의 전기였다. 그리고 절의와 도의 정신이 순천 유학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게다가 16세기 이후 순천에 들어온 사족들은 김굉필과의 학문적 연원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순천에는 전라도 최초의 사액서원인 옥천서원이 가장 먼저 창건되었다. 옥천서원에는 김굉필이 배향되었다. 이후 이수광(李睟光)을 배향하는 지봉서원[청수서원] 8개의 서원과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공을 세운 장윤(張潤)을 배향한 정충사, 허일(許鎰)을 배향한 충렬사, 충민사 등이 건립되었다. 이들 12개의 서원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한편 그 중심에는 향교가 있었다. 때문에 순천에는 “순천향교의 재임과 장의가 조그만 고을 수령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정유재란 때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왜교성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왜교성전투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최후 전투이고, 조선·명·일본 3국 군이 모두 참전한 가운데 조명군이 수륙 합동작전을 펼쳤던 펼쳐진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이었다. 그리고 명나라 군대의 전쟁 기피로 왜교성전투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벌어진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노량해전은 왜교성전투의 연장선에 있었다.
최후의 전투인 왜교성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남긴 상징성 때문이다. 왜교성전투 당시 조선 민중들은 명나라나 일본 군대 중 한 편에 가담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편에 섰더라도 일정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군 편에 가담했던 상당수의 백성은 목숨을 바쳐야 했다. 결국 전쟁은 가급적이면 피해야 한다는 것을 왜교성전투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근대]
순천의 근대는 저항의 역사였다. 일본에 저항하고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는 지주제에 저항했다.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은 순천을 지탱하는 힘일 수도 있다.
순천에는 경찰서와 읍사무소를 비롯해 순천역 등이 존재했고, 순천공립농업학교, 매산학교 등의 교육기관이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35년 김종익은 토지를 기부하여 3년제 도립 순천공립농업학교를 설립했다. 매산학교는 1910년 10월 개교했는데, 미국남장로회 한국선교회 변요한(邊要翰)[John Fairman Preston, 1875~1975], 고라복[Robert Thronwell Coit, 1878~1932] 목사가 기독교육을 위해 설립했다.
이런 조건 아래 근대 순천 지역에서는 지역과 국권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 여러 층위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 순천은 근대사회를 위한 다양한 움직임을 보였다. 동학농민운동 시기의 경우 영호도회소가 중심 공간이었다. 1893년 5월 보은집회에 동학교도와 농민이 모였는데, 순천의 동학교도 50여 명이 참석했다. 순천의 동학교도는 백산봉기에도 참가했고, 1894년 6월 하순 순창을 거쳐 순천에 돌아왔으며, 순천 지역은 영호도회소를 중심으로 한 시기에 전라남도 동부지역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였다. 영호도회소의 중심적인 역할은 대접주 김인배가 담당했다. 김인배를 비롯한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순천 관아에 진을 치고 행정력을 발휘했다. 순천은 영호도회소가 설치된 이후 약 6개월 동안 또 다른 권력, 동학농민혁명군에 의한 대체 권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순천, 광양의 행정을 접수하고, 낙안, 보성 등지의 관리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영호도회소는 이후 경상남도로도 진출하기도 했다.
의병전쟁 때 순천에서는 먼저 백낙구(白樂九)의 활동에 주목할 수 있다. 백낙구는 광양에서 은거하면서 1906년 10월 의병을 이끌었다. 당시 백낙구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은 전직 군리였다. 백낙구는 검거 이후 유배를 극복하고 전북 태인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1907년 전사했다. 본격적인 의병전쟁에는 고광순의 경우가 있다. 고광순은 지리산을 근거로 연곡사에서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하다가 순국했다.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는 회덕 출신의 김동신이 활동하기도 했다. 아울러 조계산에서는 안규홍, 강용언, 강진원, 조규하 등이 활동했다. 다시 순천의 의병부대는 수십 명 단위로 유격투쟁을 주로 전개했다. 반일과 친일세력을 처단한 이들의 활약은 주목된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 순천 지역에서는 삼일운동 이후 1920년대 청년, 농민, 학생 등이 중심이 되어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먼저 삼일운동기인 1919년 3월 2일, 순천 지역 삼일운동의 확산은 강영무가 맡았다. 1919년 4월 7일 순천읍 장날 박항래가 읍내 옥천루 부근의 연자루 위에서 만세시위를 유도했던 사실은 주목된다. 신기리의 전평규는 안용갑, 안응섭과 도란사라는 위친계를 조직하고, 별도로 2.8사를 조직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순천군 낙안면 하송리[현 순천시 낙안면 하송리]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순천의 삼일운동을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1919년 5월 31일 현재 집회 횟수 6회, 집회원 1,500명, 사망자 8명, 부상자 32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피검자는 58명이라고도 한다.
순천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에 활발했다. 그 중심은 순천청년회였다. 물론 한말부터 순천에는 일반 청년회를 비롯해 기독교계의 엡윗청년회, 면려청년회, 신창의법청년회 등과 불교계의 조선불교청년회 순천송광지회, 선암사 불교청년회 등이 있었다. 순천의 청년단체는 교육 활동과 강연회 및 토론회, 체육대회, 물산장려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순천청년회는 순천중학교설립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가담했으며, 1924년 사상대강연회를 열었다. 박영진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김양수가 연사로 등단하여 무산대중운동도 유물사관에 따라 필연적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순천청년회는 1925년 7월 혁신총회를 통해 계급적 성향을 강화하였다. 1926년 말 청년동맹의 결성으로 청년운동의 방향이 재편되자, 1927년 10월 중순 전남동부청년연맹이 순천청년연맹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순천의 청년운동은 반일적인 부문운동을 강화하는 세력의 구심이 되어 반일 전선에 함께 했다.
순천의 경우 1920년대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인 농민운동을 보여주었다. 1922년 12월 이후 순천에서는 소작인조합운동이 활발했고, 1924년에는 대지주투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25년 1월 현재 순천군에서는 22개의 농민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6년부터는 면 단위의 농민대회는 물론이고 순천농민연합회 활동이 없었다. 1929년 순천농민연합회는 순천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농민운동은 더 지하화되어 갔다. 실제로 순천 지역의 농민운동은 지역의 부문운동 가운데 오랫동안 진행된 반일운동이었다. 순천의 농민운동 세력은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에 참여했다. 특히 순천농민연합회가 순천노동연합회, 무산자동맹회와 함께 사회주의적 지역운동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농민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운동도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
[현대]
순천의 현대는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현대의 서막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도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순사건이었다. 그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여순사건을 전해 들은 사람도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도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관련 법규도 제정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성격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이름조차도 확정되지 않았다. 여순사건이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정당한 명칭을 얻을 때까지 순천의 현대는 공백으로 비워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