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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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장대훈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 분포하고 있는 고대의 무덤 또는 과거 및 현재의 무덤 중에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
[개설]
고분(古墳)이란 글자 그대로 오래된 옛 무덤을 뜻하며 과거 죽은 이를 위한 매장 의례 행위[무덤, 부장품, 제사 등]가 물질적인 증거로 남아 있는 산물을 말한다. 고고학적으로는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고분의 의미와 개념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분의 실질적인 명칭은 매장 주체부를 근거로 제시되어야 하는데 영암군의 고분들은 옹관 고분, 목관 고분, 돌방무덤[石室墳, 전방후원형 포함], 석관 고분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전방후원형 고분의 경우, 돌방무덤을 매장 주체부로 하지만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관련성이 있기에 고분의 외형에 따라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조사]
영암군은 영산강을 사이에 둔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과 함께 고고학적 지표 조사를 통해 다수의 고분들이 영산강 주변에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다. 지표 조사를 통해 알려진 영암군의 고분은 총 44개 군이며 이 가운데 시종면에 25개의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어 가장 많은 밀집도를 보인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은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 내동리 초분골 고분군, 와우리 우정 고분군, 선황리 계양 옹관 무덤, 옥야리 신산 고분군, 만수리 만수 고분군, 영암 신연리 고분군, 영암 옥야리 고분군 등이 있다.
[특징]
영암 지역의 고분들은 움무덤[土壙墓], 주구 움무덤[周溝土壙墓](주구묘), 독무덤[甕棺墓], 돌방무덤[石室墳] 등 시대적인 순서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분들의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다양한 주구를 가지고 있다. 네모꼴, 타원형, 혹은 말굽형[마제형], 사다리꼴[제형], 방형, 원형 등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사다리꼴과 전방후원형이 있다. 사다리꼴 주구는 주구 움무덤에서 처음 나타난 이후 목관 고분과 옹관 고분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반면 전방후원형 주구는 전기 돌방무덤, 즉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단기적으로 나타난다.
둘째, 분묘에서 고분으로 발전되면서 수평적인 확장과 수직적인 확장이 이루어진다. 수평적인 확장은 기존 무덤에 추가로 매장 시설을 하면서 옆으로 확장되는 것이고, 수직적인 확장은 기존 무덤의 봉분이 추가로 매장 시설을 하면서 봉분이 높아지는 것이다.
셋째, 영암 지역에는 5세기 후반까지 옹관 고분이 집중적으로 분포하지만 목관 고분의 분포가 훨씬 넓다. 즉,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장성, 담양, 해남, 장흥, 보성 지역 등 전남 서부 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영암 지역[영산강 유역권 포함]의 옹관 고분 등장은 대체로 두 가지 견해로 설명되고 있다. 하나는 중서부 지역의 주구 움무덤이 내려와 옹관 고분으로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옹관을 주묘제로 채택한 영산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처음에는 움무덤과 한 분구에 옹관을 함께 매장하다가 점차 옹관만을 매장한 고분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목관 고분은 주구 움무덤이 발전된 것으로 제형의 주구를 가지고, 그 중심에 움무덤[목관]을 여러 기 매장하여 다장(多葬)을 이루는 고분을 말한다. 이를 분구묘 혹은 복합제형분으로 부르기도 한다. 영암의 목관 고분은 영암 신연리 9호분, 만수리 4호분, 내동리 초분골 2호분 등이 있다. 이러한 목관 고분은 대체로 3세기 후반부터 굴식 돌방무덤이 유행하였던 6세기 전반까지 계속 축조되었다.
넷째, 고분의 매장 주체부가 지상에 위치하는 지상식이 많다. 이러한 전통은 주구 움무덤에서 시작되어 옹관 고분이나 목관 고분,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고분이 지상식이 아니며, 지상식이라고 하더라도 추가장을 제외하며 “선 부구 후 매장 주체부 설치”인 경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한 분구에 다장 혹은 추가장이 이루어진다. 이 전통은 주구 움무덤 단계에서 시작하여 옹관 고분이나 목관 고분에서도 보이지만 단독 고분인 돌방무덤이 유입된 이후인 7세기까지도 일부 고분에서 다장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영암 지역과 인접한 복암리 고분이 있다.
[영암 지역의 고분 문화와 주변 지역]
영산강 유역 하류권에 속하는 영암 지역은 원삼국 시대의 마한 지역 가운데 가장 늦게 백제에 편입된 곳으로 한강 유역에서 백제가 국가 단계로 진입할 즈음인 서기 3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직접 지배가 관철되는 6세기 중엽 직전까지 백제의 중앙과는 사뭇 구별되는 문화상을 보여 준다. 원삼국 시대에 서해안을 따라 유행하던 방형 주구묘(方形周溝墓), 즉 원래는 작고 낮은 분구에 목관을 안치하였던 분구묘(墳丘墓)가 삼국 시대에 들어와 이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고분, 특히 거대한 고총(古塚)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후 매장 주체부도 점차 옹관으로 바뀌어 U자형 전용 옹관을 매장한 대형 옹관 고분은 일찍부터 이 지역의 삼국 시대 문물을 대표하는 존재로 각인되었다. 과거에는 문헌 기록의 해석에 따라 영암 지역은 4세기 후반 경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았다.
삼국 시대 영산강 유역 문화권은 영산강 본류와 지류를 포함한 호남 정맥 서쪽의 전남 서부 지역이 중심이지만 북쪽으로는 전라북도 고창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해남반도까지를 포함한다. 그 가운데 옹관 고분의 중심지로는 영산강 하류 지역인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로 이 지역에는 방대형(方臺形) 옹관 고분이 많으나 전형적인 전방후원형 고분은 보이지 않는다. 복암리 고분군이 있는 나주 다시와 화순 등 영산강 중류 지역도 비슷한 양상이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옹관 고분의 중심지를 외곽에서 둘러싸듯 고창, 담양, 광주, 함평, 해남 등지에 분포하여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총기인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기까지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옹관 고분은 그 중심지가 나주 반남면 일대로 바뀌고 분구가 고총화되어 대형분이 축조되었다. 이는 사실상 고총이 존재하지 않는 백제 중앙과는 다른 양상이다. 분구 형태는 방대형, 원대형(圓臺形) 등 다양하나 분구 상부에 여러 개의 옹관을 매장하는 한 무덤 내 다장의 전통이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