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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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遺蹟-遺物 |
영어음역 | seonsa yujeokgwa yumul |
영어의미역 | remains and relics of prehistoric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이성주 |
[정의]
역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대의 유적과 유물.
[개설]
보통 이 용어 속에는 고고학에서 다루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로 생각되고 있으나, 현존하고 해독이 가능한 문헌사료가 나타나는 시대는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그 시대의 문화 사회 경제의 발전단계도 각양각색이니만큼, 이 용어의 개념은 상당히 막연하게 쓰이고 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유적을 선사유적, 발견된 유물을 선사유물이라 정의한다.
[형태]
선사시대는 역사기록이 없는 시대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며 선사시대는 실제 연대 상으로는 인류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인류의 생활이나 그 변화를 추적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기록이 없으므로 유적이나 유물 등 물질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며, 또 대부분의 자료들이 이미 없어졌거나 아니면 남아 있는 경우도 땅 속에 묻혀 있어서 실제 연구에 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사에 대한 연구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그리고 청동기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는 구석기시대의 경우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발견 조사되기 시작한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전국적으로 구석기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신석기 청동기의 경우도 현재까지 다수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강원도 동해안에 면한 강릉 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인간집단에 점유되어 많은 유적들이 남겨지고 그 안에 축적된 유물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강릉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석기유물을 포함하고 있는 고토양층이 곳곳에 남아 있다. 홍적세의 기간 중에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면서 해수면이 그에 따라 지금보다 낮아지거나 다시 높아지고는 했다. 그러한 지형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깎여나가지 않는 고토양층에서는 흔히 많은 구석기유물이 발견된다. 강릉 지역의 해수면의 변동에 따라 퇴적과 침식이 반복되면서 살아남은 해안과 하천변에 단구면이 군데군데 잘 발달되어 있다.
강릉시 강동면 심곡리 일대의 해발 100미터 위의 해안 단구면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중부홍적세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거칠게 제작된 주먹도끼와 찍개류들을 전기구석기시대 유물로 보고 있다. 심곡리와 가까운 금진리와 안인리 일대에서도 단구면이 발달하고 석기가 채집되고 있다. 강릉시 내곡동, 담산동 일대, 그리고 옥계면 현내리와 주수리 일대에서도 해발 20m 내외의 높이에서 단구면 확인되는데 각 지점에서 석기들이 채집되었다. 낮은 단구면의 고토양층은 심곡리와 같은 높은 지대보다 늦은 시기에 속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출토되는 석기들도 소형화된 것으로 늦은 시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강릉 지역의 단구면에서는 아직 후기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에 속하는 전형적인 돌날석기와 같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석기시대]
강원도 동해안의 신석기 유적과 유물은 양양군 오산리유적이 발굴되면서 크게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신석기시대 토기라면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였고 신석기시대의 개시연대도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쯤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양양 오산리유적에서는 이른바 ‘오산리식토기’라고 이름 붙여진 토기가 나왔는데 아가리가 넓고 바닥은 극히 좁은 납작바닥이며 빗살무늬 토기처럼 모래가 많이 섞인 점토를 사용하지 않고 점토질이었다. 이 오산리식토기는 방사성 탄소연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8천년 이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아주 이른 단계의 신석기문화이다.
영동지방의 신석기문화는 토기, 주거지, 생산도구의 형태에서 특징적인 양상을 보여주며 여러 지역의 문화들이 들어와 서로 섞이는 점도 중요한 특색 중에 하나이다.
오산리식토기와 융기문토기가 유행하던 신석기시대 조기문화는 전형적인 서해안식 빗살무늬토기가 영동지방으로 전해지면서 대체된다. 이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는 유적으로는 강릉 초당동유적이 대표적이며 강릉과 인접한 양양 지경리 유적에서도 그러한 양상이 확인 된다. 이 시기의 토기문화에는 황해도와 한강 하류역의 즐문토기문화가 영서지방을 거쳐 유입되고 금강 유역이나 남해안지역의 문화요소도 섞여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영동지방 주민은 해안가에서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유적은 석호 연변의 사구지대에서만 발견된다. 석호와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자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신석기인의 마을은 해안가 사구지대에 집중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와는 상당히 다른 구릉성 주거도 발견된다. 강릉 지변동유적과 같은 경우는 발굴조사 결과 바다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구릉 상에 거주 하였던 사람들이 버린 토기편과 석기들이 구릉 하단의 곡저에 퇴적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로서는 조금 늦은 시기로 편년할 수 있는 이 지변동유적의 양상은 아무래도 숲에서 채취할 수 있는 식량감에 더 의존했던 사람들이 거주한 결과로 이해되며 이와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강릉에는 교동·유천동·안현동 신석기시대 유적이 있는데 모두 구릉상에서 발견된다.
[청동기시대]
강릉의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은 구릉지 곳곳에서 흔하게 발견되며 주요한 유적으로는 취락지와 고인돌 유적이다. 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강릉 교동유적과 방내리유적 등이 있다. 이중에 이른 시기에 속하는 교동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이중구연에 단사선이 들어가 있는 무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공열이 들어가 있는 것도 보인다.
전기의 취락은 구릉에서만 발견되는데 주로 하천변이나 석호 주변의 낮은 구릉에 입지하므로 산지 가까이로 진출하지 않고 바다에 가까운 구릉지대가 주로 점유된다. 영동지방 청동기시대 중기에 속하는 유적의 양상은 전기나 후기에 비해 불분명한 편이며 강릉 지방에서 중기에 해당할 만한 유적은 찾기 어렵다.
후기에 속하는 강릉 방동리유적은 사천천 가까이에 위치한 구릉지대에서 발굴된 점토대토기단계의 취락이다. 나지막한 능선들이 연속되는 가운데 세 지점의 구릉 위에서 취락이 확인되었는데 이전 시기의 어느 취락보다 규모가 크다. 원형의 수혈유구들은 저장시설로 기능이 추정되고 있는데 2-3의 주거지와 함께 군을 이루고 있어 세대공동체와 같은 집단의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동리 유적에서는 가장 높은 구릉에 이중환호 유구가 발견되어 원시적인 방어시설로 추측되고 있다.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후기가 끝나고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강릉 지역의 고고학적 문화내용은 일변한다. 그 변화의 양상은 결코 점진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으며 급격한 문화적 교체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 소형의 방형, 혹은 원형의 주거지가 구릉지대를 점유하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은 소멸하고 철기시대가 되면 모든 취락은 다시 해안의 사구지대로 이동하며 주거지의 형태도 철(凸)자형, 혹은 여(呂)자형의 매우 대형화되고 정형화된 움집이 축조된다.
토기의 양상에서도 청동기시대 후기 원형점토대토기의 기종이나 기형들을 철기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고 흔히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라고 부르는 바리와 항아리 단지, 그리고 대접들과 함께 소량의 타날문단경호가 주류를 이룬다.
그밖에 다른 물질문화요소에서도 이전 단계의 양상이 거의 소멸하고 새로운 양상으로 대체된다. 특히 강릉의 안인리·동덕리·교항리·초당동·강문동 유적은 이시기 영동지역 철기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철기문화는 5세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신라문화로 교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