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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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關東第一樓,竹西樓 |
영어공식명칭 | Jukseoru Pavilion, The Best View in Gwandong Province |
이칭/별칭 | 관동제일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관동팔경의 하나로, 강원도 삼척시오십천 절벽 위에 자리한 누정.
[개설]
삼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죽서루이다. 오십천 절벽 위에 자리한 보물 제213호 죽서루는 우리나라 대표 누각이기에 삼척의 상징이 되었다. 죽서루는 건물 자체의 오래된 역사나 웅장함뿐만 아니라 주변의 뛰어난 경관으로 말미암아 사시사철 시인과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풍류를 아는 시인이라면 죽서루에 올라 감동을 시로 읊었으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흥취를 화폭에 담았고, 글씨를 쓰는 사람은 감흥을 검은 먹에 담아 글씨로 남겼다.
[관동팔경의 으뜸]
죽서루(竹西樓)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이다. 관동, 곧 강원도동해안 지역은 산수의 경치가 일찍이 우리나라 제일로 꼽혔다. 관동팔경은 관동 지역의 뛰어난 경관 속에 있는 누대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덟 곳을 지칭한다.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꼽는다. 월송정은 ‘月松亭’이라고도 한다. 이들 여덟 곳 가운데 다만 사람에 따라 가장 남쪽의 월송정 대신 북쪽에 있는 흡곡(歙谷)[현재의 통천군 지역]의 시중대(侍中臺)를 관동팔경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흔히 죽서루를 관동팔경의 으뜸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미수허목(許穆)[1595~1682]은 『죽서루기(竹西樓記)』에서 죽서루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인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죽서루기』에 따르면 죽서루는 바다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멀리 바다가 보이고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는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오십 구비를 돌아 동해 바다로 들어가는 오십천은 삼척에 와서 앞을 막아 선 산을 깎아 높은 암벽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 아래 산을 깎느라 지친 강물이 잠시 쉬는 동안 깊은 소(沼)를 만들었다. 죽서루는 그 깊은 소에 그림자를 담그고 높은 암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죽서루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다른 관동팔경의 두 배이다. 다른 관동팔경이 누각(樓閣)이나 정자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는 하나의 즐거움만 있는 것에 비하면 죽서루는 누각 아래 오십천이 감아 돌면서 만들어 놓은 소에서 뱃놀이를 하며 죽서루를 올려다보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바다나 호수만을 즐길 수 있지만 죽서루는 강과 산은 물론 바다도 더불어 즐길 수 있다. 죽서루에 오르면 서쪽으로 백두대간의 두타산(頭陀山)[1353m]과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을 볼 수 있다. 오십천 물길을 따라 눈을 돌리면 멀리 봉황산(鳳凰山)[149m] 너머로 넘실대는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죽서루에는 ‘竹西樓’라는 현판보다도 오히려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글씨가 쓰인 현판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다.
[삼척 관아 속의 죽서루]
죽서루는 삼척 관아(官衙)의 객사(客舍)인 진주관(眞珠館)에 딸린 누각이다. 지방의 관아는 크게 동헌, 내아, 객사로 구성된다. 삼척 관아는 삼척읍성 안에 있었으며, 동헌과 내아 및 객사가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객사인 진주관은 동헌의 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죽서루는 진주관의 별관이었다.
죽서루는 객사의 부속 건물로, 접대·휴식·향연을 주목적으로 지어진 누각이었다. 죽서루라는 이름은 이 누각을 세울 당시 죽서루의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었고, 그 죽림 안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어서 죽장사의 서쪽에 있는 누각이란 뜻으로 죽서루가 되었다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죽서루의 동쪽에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집이 있어서 죽서루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죽서루가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명종 대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죽서루 시(詩)가 남아 있고, 『제왕운기』를 편찬한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벼슬을 버리고 두타산에서 은거할 때 지은 시가 현재 죽서루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 시기는 늦어도 고려 때나 그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3년(태종 3) 삼척부사로 있던 김효손(金孝孫)[1373~1429]이 옛 터에 인연하여 누각을 중건한 이래 25차례의 중수, 증축, 개조, 단청이 있었다. 특히 1600년(선조 33) 삼척부사 김권(金權)[1549~1622]이 동쪽 2칸을 개수하였으며, 1715년(숙종 41) 삼척부사 정호(鄭澔)[1648~1736]는 없어진 죽림을 회복하기 위하여 대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국 대표 건축물]
죽서루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국 대표 건축물이다. 죽서루 마당에 서면 장방형의 누각이 암반 위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둥지에 내려앉는 학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특히 죽서루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루고, 푸른 하늘에 용마루의 곡선이 보일 듯 말 듯한 기울기로 선을 긋고 있다. 정면 7칸의 긴 지붕은 기울기가 매우 완만하다.
죽서루의 건축에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둥이다. 죽서루의 기둥은 길이가 다 다르다. 하층 기둥과 바로 상층을 지지하는 기둥을 합친 죽서루의 기둥은 모두 22개이다. 그 가운데 자연 암반에 세워진 기둥은 13개이다. 나머지 9개는 자연석의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자연 암반의 높이가 다르고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초석의 높이도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둥의 길이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자연 암반이나 자연 상태의 초석을 다듬지 않고 상당한 정성을 들여서 그레질을 하여 기둥과 초석을 밀착시켰다. 이처럼 죽서루는 주어진 자연 환경에 순응하는 한국 건축의 전형을 보여 준다.
죽서루의 정면은 7칸이다. 죽서루의 정면은 원래 5칸이었다가 나중에 좌우 1칸씩 증축하여 7칸이 되었다. 좌우 1칸씩을 증축하여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도 좌우에 있는 천연 암반을 통해 양쪽에서 곧장 누각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죽서루에는 2층 누각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다리가 없다. 가능한 한 주어진 자연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는 한편 인공 구조물은 최소화하였다. 좌우에 증축된 1칸씩의 기둥은 남·북 측면 모두 천연 암반 위에 세워져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죽서루의 양 측면은 칸수가 다르다. 죽서루는 북측면이 2칸이고, 남측면은 3칸이다. 이는 양쪽 측면의 칸수를 동일하게 하는 일반 건축물과 다른 점이다. 죽서루의 양 측면 칸수에 차이가 있는 것은 자연 암반의 형태가 남측은 3칸, 북측은 2칸으로 각각 세우는 것이 가장 적절할 뿐만 아니라 홀수 칸인 남측면을 주 출입구로 삼기 위해서였다. 출입은 남측과 북측 모두 할 수 있다. 남측에는 3협칸의 어칸 부분에 박석으로 포장하여 출입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북측에는 가운데 기둥 좌우로 자연 암반을 딛고 오르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남측면에는 죽서루 동쪽 정면에 있는 현판과 별도로 ‘죽서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처럼 죽서루는 자연 암반 형태에 맞게 기둥 수를 적절하게 변형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남측면을 주 출입구로 설정하였다. 좌우를 반드시 대칭으로 하여야 한다는 서양 건축의 경직된 발상과는 달리 형식보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줄 아는 우리 건축의 모습을 죽서루는 잘 보여 주고 있다.
죽서루의 공포(栱包)는 주심포(柱心包)와 익공(翼工) 두 가지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의 5칸은 주심포로 되어 있으며, 좌우로 1칸씩 증축된 곳에는 익공을 채택하였다. 한 건물에 주심포와 익공이라는 두 가지 양식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 건축물에서 드문 일이다. 한 건물에 하나의 양식을 채택하여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반 상식을 죽서루는 거부한 것이다. 죽서루는 두 가지 양식을 동시에 채택하고 이를 조화시킴으로써 통일성과 함께 변화도 함께 추구하였다.
[누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관]
죽서루에 올랐을 때 누각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절경을 이룬다. 죽서루에 오르면 주변 경관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어 온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한 칸은 살아 움직이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앞뒤 8개 기둥 사이의 7칸은 7폭의 연속된 그림을 이루어 마치 7폭짜리 병풍을 앞뒤로 펼쳐 놓은 듯하다. 이처럼 경치를 누각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조경 예술 기법으로 이른바 차경(借景)이라고 한다. 이처럼 죽서루의 주변 경관은 한 폭의 파노라마와 같다.
죽서루의 최고 경관은 저녁 무렵 두타산 넘어로 해가 질 때의 모습이다. 죽서루가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보니 아침의 동쪽 경관보다는 저녁의 서쪽 경관이 제격이다. 햇살이 백두대간을 넘어 하루를 마무리할 때 황금빛 석양의 긴 그림자가 죽서루의 기둥들 사이로 밀려들면서 누 안을 온통 붉게 물들이게 되면 낭떠러지 아래 오십천의 강물도 황금빛으로 일렁인다. 원숙한 경지에 이른, 인생 말년까지 온 예술가의 마지막 한 점까지도 모두 불태우는 정열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석양이다.
죽서루를 선계(仙界)로 만드는 또 하나의 자연물은 누각 남쪽에 있는 괴석(塊石)이다. 대체로 괴석은 일반 돌과 달리 구멍이 뚫려 있거나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자연석으로, 다른 곳에서 채취하여 누각이나 정원의 뜰에 늘어놓아서 그곳이 현실 세계가 아닌 이상향의 세계임을 표현하기 위한 용도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죽서루 남쪽에 있는 이 괴석은 인위로 다른 곳에서 채취하여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어 온 것이다. 석회암이 오랜 세월과 숱한 바람에 깎이고 빗물에 녹아 구멍이 뚫리는 과정을 거쳐 특이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멍은 언제부터인가 용이 드나드는 용문(龍門)이라 불렀으며, 그것을 대문에 현판 걸 듯 행초서의 음각 글씨로 새겨 두었다. 더욱이 용문바위 위에는 성혈이 있어서 이곳이 더욱 신성한 곳임을 말해준다. 성혈(性穴)은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선사시대 때부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일종의 암각화이다. 후대로 오면서 민간신앙으로 정착되어 자식을 기원하는 신앙처가 되었다.
[시서화로 남겨진 풍류]
죽서루를 다녀간 숱한 사람들의 흔적은 시, 글씨, 그림으로 남아 있다. 시인은 시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는 그림으로 시를 썼으며, 서예가는 글씨로 그림과 시를 그리고 썼다. 이들의 자취는 편액으로 만들어져서 죽서루 누각 안에 걸려 있기도 하고 그들의 문집과 화첩 속에 숨어 있기도 한다.
죽서루에 걸려 있는 제액(題額) 현판은 여러 개가 있다. 누각의 동쪽에는 삼척부사를 지낸 이성조(李聖肇)[1662~1739]가 쓴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이 있다. 죽서루의 남쪽 측면에는 같은 이름의 ‘죽서루’라는 또 하나의 현판이 있다. 그 글씨는 마치 대나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삼척부사를 지낸 이규헌(李奎憲)의 작품이다.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허목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으나 허목의 글씨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오십천 강물이 휘감아 돌듯이 굽이쳐 흐르는 가운데 그 획이 부드러운 강물이 절벽을 깎아내듯 내재된 힘으로 가득하다.
죽서루를 노래한 시는 현재 알려진 것만 500수를 넘는다.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온 다양한 감흥을 노래하였다. 아름다움에 감흥을 느끼는데 남녀노소 구분이 없듯 신분이나 계층, 성별의 구분 또한 있을 수 없다. 이들 시 가운데 몇 수는 현재 현판으로 만들어져서 죽서루의 한 부분을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화가들은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관을 화폭에 담아 간직하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죽서루 그림은 겸재정선(鄭敾)[1676~1759]의 그림이다. 정선은 동해안을 유람하고 나서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그렸다. 이 화첩에 죽서루 그림이 있다. 정조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에게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비롯한 영동지방의 절경을 그려오도록 어명을 내렸다. 정조의 어명을 받은 김홍도는 44세가 되던 해인 1788년(정조 12) 가을에 관동 지방의 해산승경(海山勝景)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때 그린 죽서루 그림은 정조가 실경(實景)을 보고 싶어서 내린 지엄한 어명임을 인식하고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한 필치를 보여 준다.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죽서루 그림은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에 전해 내려온다. 당시 죽서루 그림은 단원김홍도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어서 서로 비교해 가며 보면 강세황과 김홍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임금에게 바쳐야 하는 김홍도의 그림이 사실에 가깝고 공공 화원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강세황의 그림은 사사롭고 문인 전형의 문인화 특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서루를 그린 그림은 앞에서 소개한 전통 회화 이외에 민화 또한 많다. 민화의 산수화는 집안 장식용의 병풍 형태로 이용되었다. 특히 금강산과 관동팔경이 가장 많이 애용되었기 때문에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는 반드시 한 폭을 차지하고 있었다. 민화 산수화는 실경을 그린 전통 산수화와 달리 환상 및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죽서루는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만인의 공간이다. 죽서루는 시간을 초월한 모든 시대인의 것이다. 오늘도 죽서루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 죽서루에 올라 신선이 되고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된다. 그리고 죽서루와 하나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로 죽서루를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