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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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湖南-名村-鳩林-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옥 |
관광지 | 성기동 국민 관광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산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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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 죽정 서원 -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정자 | 회사정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정자 | 간죽정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사우 | 서호사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박물관 | 영암 도기 박물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가마터 | 영암 구림리 가마터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
[정의]
호남 3대 명촌으로 손꼽히는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의 마을.
[개설]
구림 마을이 호남의 3대 명촌 중 하나가 된 배경에는 구림 마을의 풍수지리와 지명 유래가 관련되어 있다. 곧, 구림 마을의 입지가 풍수지리상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히며 지명의 유래에서 마을의 역사와 전통이 깊음이 드러나기에 호남 3대 명촌으로 꼽힌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는 “월출산 남쪽에는 월남 마을이 있고 서쪽에는 구림이라는 큰 마을이 있는데, 둘 다 신라 때부터 명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림과 도선]
‘구림(鳩林)’이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전라도 영암군 고적」에서 확인된다. 그 기록에 따르면 “최씨 성을 가진 신라 사람이 있었다. 정원에 오이 하나가 열렸는데, 길이가 한 자가 넘어 집안사람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어느 날 그의 딸이 몰래 오이를 따 먹었는데, 아이를 잉태하였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남몰래 딸이 낳은 아이를 대숲에 버렸다. 며칠이 지나 대숲에 가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날아와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중이 되었는데, 이름이 도선(道詵)[827~898]이다.”라는 이야기가 속설에 전하여 오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마을의 지명으로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을 써서 구림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마리의 용이 품은 마을]
구림 마을은 영암군 영암읍에서 남서쪽으로 약 10㎞ 떨어진 곳에 있다. 구림 마을의 동편에는 월출산이 있고 그 산자락 아래에 도갑사가 자리 잡고 있다. 도갑사에서 구림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일본 아스카 문화의 시조로 알려진 왕인(王仁)[?~?] 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聖基洞) 국민 관광지가 있다.
또한 구림 마을의 입지는 영암군에 있는 월출산의 주지봉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의 낮은 구릉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데, 예로부터 ‘두 마리의 용이 품은 마을’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하였다.
이러한 구림 마을은 열두 개의 크고 작은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마을은 동성동본의 성씨들이 정착하여 동족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16세기에 향안(鄕案)과 동계(洞契)를 조직하여 향촌 공동체를 운영하였으며, 17~18세기에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는 문중 사우(祠宇)를 성씨별로 건립하여 향촌 내에서 사족 양반층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구림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
18세기에 간행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구림 마을의 열두 동네는 쌍취정(雙翠亭), 북송정(北松亭), 남송정(南松亭), 상서호정(上西湖亭), 하서호정(下西湖亭), 학암(鶴岩), 죽정(竹亭), 구림(鳩林), 국사암(國師岩), 동송정(東松亭), 취정(翠亭), 동정자(東亭子), 남정자(南亭子), 동계리(東溪里), 고산리(高山里)이다. 이들 자연촌에 동성동본의 사람들이 정착하였는데 구림 마을의 대표 성씨는 낭주 최씨(朗州崔氏), 선산 임씨(善山林氏), 함양 박씨(咸陽朴氏), 창녕 조씨(昌寧曺氏), 해주 최씨(海州崔氏), 연주 현씨(延州玄氏) 등이다.
구림 마을에는 성씨별로 문중과 관련한 유적이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선산 임씨 임구령(林九齡)[1501~1562]이 조성한 지남들 조성 기념비, 함양 박씨 문중 선조들의 제사를 모시는 죽정 서원(竹亭書院), 오한(五恨) 박성건(朴成乾)[1418~1487]이 건립한 간죽정(間竹亭), 연주 현씨의 정자인 죽림정(竹林亭), 창녕 조씨의 문중 사우인 서호사(西湖祠), 낭주 최씨의 호은정(湖隱亭), 해주 최씨의 동계정(東溪亭) 등이 있다.
구림 마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낭주 최씨이다. 낭주 최씨는 일명 영암 최씨로도 불리는데, 고려 건국 때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별 박사’ 최지몽(崔知夢)[907~987]에게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려를 세우기 전 왕건(王建)[877~?]은 전라도 서남 해역에서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甄萱)[867~935]과 한판 승부를 벌였고 그 흔적은 서남 해역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그 첫 번째 전투지가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이다. 왕건은 고이도를 징검다리 삼아 후백제를 공략하였으나 견훤의 방어벽을 넘어서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구림 마을에 살던 최지몽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최지몽은 왕건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고 마침내 왕건은 후백제를 공략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영암 최씨는 고려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토착 세력으로 성장하였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급격히 쇠락하였다.
조선 시대에 구림 마을을 대표했던 성씨는 선산 임씨이다. 선산 임씨는 본래 전라도 해남에서 세거하였는데, 초계 정씨·하동 정씨·수원 백씨 등과 혼인하여 향촌에서 사족 양반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하여 이 지방을 대표하는 유력한 성씨로 성장하였다.
해남의 선산 임씨 임우형(林遇亨)[1473~?]은 이전부터 영암 구림 마을에서 살던 음성 박씨와 혼인하여 임천령(林千齡)·임만령(林萬齡)·임억령(林億齡)·임백령(林百齡)·임구령 등 5형제를 낳았다. 이 가운데 막내아들인 임구령이 영암 구림 마을로 입향하였다. 임구령은 나주 목사와 남원 부사를 역임한 후 말년에 영암 구림 마을에 정착하였는데, 이때 제방을 쌓아 1천여 마지기[논밭을 세는 단위로, 지역이나 토질에 따라 다른데, 한 마지기는 대략 495~990㎡ 정도이다.]의 농경지를 조성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임구령이 건설한 제방을 진남제(鎭南堤)라 부르고 제방 안에 조성된 토지를 ‘지남들’이라 불렀다. 지남들은 조선 후기 구림 마을 사람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조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구령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임호(林浩)[1522~1592]는 1565년(명종 20) 상부상조(相扶相助)를 목적으로 구림 대동계(鳩林大洞契)를 창립한 발기인이다. 구림 대동계(鳩林大洞契)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계 조직이다. 차남 임혼(林渾)[1522~?]의 외손자인 조행립(曺行立)[1580~1663]은 구림 대동계의 중수자이다.
선산 임씨는 창녕 조씨·함양 박씨·해주 최씨·문화 유씨 등과 혼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구림 마을 대표 성씨로 성장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충절 공신인 영암 출신 정운(鄭運)[1543~1592]의 모친도 바로 선산 임씨였다.
구림 마을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성씨는 함양 박씨다. 함양 박씨의 구림 마을 입향조는 박성건이다. 오한 박성건은 이전부터 구림 마을을 이끌던 성씨였던 난포 박씨·선산 임씨 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구림을 대표하는 유력 성씨로 성장하였다.
향촌 내에서 함양 박씨의 위상을 정립한 인물은 박규정(朴奎精)[1498~1580]이다. 박규정은 임구령·신희남·이후백·백광훈 등과 함께 영암 향약을 창설하고, 영암 향안(鄕安)[지방 사족(士族) 명단]을 마련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함양 박씨는 1479년(성종 10)에 간죽정을 건립하여 문중 후손들을 양성하는 장소로 활용하였으며,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대기(朴大器)[1537~1601]와 박승원(朴承源)[1562~?] 등 다수의 충절 인물을 배출하면서 향촌 사회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위상을 정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함양 박씨는 구림 대동계를 중수하는 데에 주력하였고, 1646년(인조 24)에는 구림 대동계의 집회 장소인 회사정(會社亭)을 건립하는 데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1681년(숙종 7) 함양 박씨는 문중 사우인 죽정 서원을 건립하여 동족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1726년(영조 2)에는 서인 노론계였던 귀락당(歸樂堂) 이만성(李晩成)[1659~1723]을 원장으로 추대하여 지방 사족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죽정 서원의 건립과 활동은 함양 박씨가 구림 마을을 비롯한 영암 지역을 대표하는 성씨로 성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마을 공동체의 구림 대동계와 집회 장소인 회사정]
조선 시대 영암 구림 마을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를 자치적으로 운영하고자 동계(洞契)를 조직하였다. 1565년(명종 20)에 처음 대동계를 조직한 사람은 함양 박씨인 박규정과 선산 임씨인 임호 등이었다. 2012년 현재 구림 마을에는 구림 대동계의 집회 장소인 회사정(會社亭)이 현전하고 있으며, 1609년(광해군 원년)에서 1747년 사이에 작성한 구림동헌(鳩林洞憲)과 동계(洞契) 관련 문서가 전하여 온다. 구림 대동계 규약을 살펴보면 도로 보수·산림 보호·교량 건설 등 마을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마을 일에 태만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출동(黜洞)이라는 벌칙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출동은 동네에서 더는 거주할 수 없게 하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구림 대동계는 호남의 대표적인 동계(洞契) 조직이고 회사정은 그 상징물이어서, 조선 후기 호남 지방 향촌 사회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구림 마을의 당산제와 영암 도기]
구림 마을의 지킴이인 당산나무는 영암 도기 박물관 정원에 있으며, 그 어귀에 구림 대동계의 집회 장소인 회사정이 있다. 구림 마을 사람들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제(堂山祭)를 모셨다. 당산제는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이다. 매년 정월에 마을 어른들은 제관을 뽑고, 당산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쳐 놓아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영암 도기 박물관 부지는 본래는 구림 대동계의 소유였다고 한다.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구림 대동계원들이 그 땅을 구림 중학교의 부지로 변경해 주었고, 1996년에 구림 중학교가 신축 교사로 이전하면서 폐교가 된 자리를 1999년에 새로 단장하여 영암 도기 문화 센터로 활용하였다. 뒤이어 2008년에는 재건축을 하여 영암 도기 박물관으로 승격하였다. 특히 영암 도기는 우리나라 유약 도기의 발상지인 영암 구림리 가마터[사적 제338호]의 전통성을 근거로 하여 새롭게 개발된 한국 도자기이다. 1250℃의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였기에 강도가 뛰어나고 붉은 영암 황토를 원료로 하여 환경 호르몬이 발생하지 않으며 유해 물질이 없어 식생활 용기로 적합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영암 도기 박물관 인근에 영암군립 하정웅 미술관이 준공되어 그림·조각 등의 미술품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