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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791
한자 佛敎
영어음역 Bulgyo
영어의미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흥삼증보:홍영호

[정의]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敎祖)로 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

[개설]

옛날부터 강릉을 비롯한 영동 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교통이 불편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변방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말해 영동 지역은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해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이 지역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변천]

우리나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도입된 것은 고구려의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의 일이다. 신라의 경우는 불교가 공인되는 법흥왕(法興王) 14년(527) 이전에 묵호자(墨胡子)와 함께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이미 선교(宣敎)를 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속하였던 강릉은 아마 이즈음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다.

[인물 및 사찰]

기록상 강릉 지역의 불교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자장(慈藏)이다. 그는 중국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親見)하였다. 이때 문수보살은 신라의 동북방 지역인 오대산에 문수 진신(眞身)이 상주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을 순례하여, 우리나라에 오대산신앙을 성립시켰다. 이와 같이 자장오대산에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그가 강릉 지역에 등명사(燈明寺)·법왕사(法王寺)·용연사(龍淵寺)·방현사(坊縣寺) 등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 후 오대산신앙보천(寶川)에 의해 화엄만다라적인 구상과 실천으로 발전해나갔다.

자장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의상(義湘)은 낙산(洛山)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친견하였다. 그의 도반이었던 원효(元曉)는 이곳에 찾아와 관음보살의 상주처(常住處)임을 입증하였다. 신라의 불국토신앙이 확산되면서 낙산이나 오대산은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땅이라고 믿어졌다. 영동 지방은 불교와 낯선 곳이 아니라 본래 불국정토였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땅이라는 인연이 다른 지방보다도 강하였다. 이제 불교계에서 외진 곳이 아니라 불교의 성지(聖地)와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신효거사(信孝居士)가 공주(公州)에 살았는데, 어느 날 학의 깃을 주어 사람을 보았더니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거사가 명주 지역에 이르러 깃을 통해 사람을 보니 모두 사람의 형상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명주에 있던 오대산에 머물러 살면서 수행 정진하였다. 이와 같이 강릉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불심이 깊은 불국토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덕왕(景德王) 때인 752년에 미륵신앙(彌勒信仰)을 신봉한 진표(眞表)는 명주에 와 불법(佛法)을 전하고 계(戒)를 주면서 교화(敎化)하였다. 신라 하대에 유행한 남종선(南宗禪)을 최초로 전파한 도의(道義)는 자신의 주장이 마어(魔語)라고 배격을 받자 은둔할 곳을 찾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왔다.

같은 남종선을 배웠던 범일(梵日)은 김공(金公)의 도움으로 강릉의 굴산사(掘山寺)에 주지하게 되어 사굴산문(闍崛山門)을 개창할 수 있었다. 그는 낙산사에 불전을 세우고 정취보살(正趣菩薩)을 모셨고, 신복사(神福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또 강릉에는 범일이 출가·수도하였다는 법왕사가 있고, 굴산사 근처에 있었던 흑암사(黑岩寺)는 위치상 범일이 창건하였을 것으로 본다. 특히 흑암사는 자적선사(慈寂禪師) 홍준(洪俊)[882~939]의 비문에 나오는 흑암선원(黑巖禪院)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비문에 의하면 홍준은 동쪽으로 가서 태령(太嶺)을 넘어 ‘흑암선원’에 이르러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853~923]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건부(乾符) 6년(879) 명주(溟州)의 입량율사(入良律師)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범일의 문하에서 개청(開淸)·행적(行寂)·신의(信義) 등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사굴산문은 나말려초에 크게 번창하였다. 개청은 초적(草賊)들 때문에 굴산사를 피해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직접 창건했다고 전하는 보현사(普賢寺)[地藏禪院]로 옮겨 머물렀고, 신의는 오대산에 들어가 수행하였다. 보현사에는 개청이 입적한 후 세워진 낭원대사 오진탑비가 있는데, 비문의 내용을 통해 당시의 명주 사회와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다.

당시 강릉 지역에 불교가 흥성했다는 것은 유물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즉 옥천동사지 옥개석(屋蓋石)과 초층탑신부재(初層塔身部材)는 9세기 전기의 양식이며, 수문리 당간지주(幢竿支柱)대창리 당간지주, 보광리 석불좌상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고려시대 영동 지역 사찰 중 기록이 가장 자세한 것은 낙산사이다. 고려 태조(太祖)는 나라를 세운 직후 봄·가을에 낙산사로 관리를 파견하여 삼일재(三日齋)를 올려 치성(致誠)하였다. 1197년 유자량(庾資諒)은 관음굴에서 기도하다가 파랑새의 영험을 받았다. 이후 낙산사는 관음보살과 원(元)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낙산사는 이성계의 증조인 익조 이행리가 관음굴에서 기원하여 도조를 낳았고, 도조는 그의 자손이 조선을 개창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낙산사는 조선의 창업과 관련한 사찰로 주목받아 태조 이성계 이래 왕실의 후원 속에서 조선시대 동안 번창하였다.

굴산문이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서 어떻게 활동하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다만 굴산사 주지 혜식(惠湜)이 1353년에 『전등록(傳燈錄)』을 중간(重刊)해서 널리 보급하는데 참여했다는 것뿐이다. 보현사에서 개청의 제자들이 강릉 지역민들을 교화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굴산사지에서 나온 유물 중 고려시대의 것도 있는 점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문헌에 의하면 염양사(艶陽寺)와 등명사, 유물에 의하면 신복사·한송사(寒松寺)[文殊寺]·산계사(山溪寺)·안국사(安國寺) 등이 고려시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명주[강릉] 출신인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圓融國師) 결응(決凝)[964~1053]이 고향에 창건한 안국사[관음리사지, 안곡사로 전해짐]는 고려 문종으로부터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등명사[현재 등명낙가사]는 폐석탑재와 고려시대의 석탑을 통하여 신라말~고려초에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의 여러 기록에도 나오고 있어 고려시대에 번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원사(上院寺)우왕(禑王) 때에 나옹(懶翁)의 제자인 영로암(英露庵)의 발원(發願)과 최백청(崔伯淸)의 희사(喜捨)로 중창되었다. 고려 말 부터 흥기(興起)의 기운을 보였던 상원사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왕족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불교에 관심을 지녔던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정종 2년(1400)에 상원사를 원찰로 삼고 순행(巡幸)하였다. 태종 또한 상원사 사자암(獅子庵)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정하였다. 상원사는 세종 6년(1424)에 강원도 교종사원(敎宗寺院)의 본산(本山)으로 지정되었다. 이와 같은 왕실의 비호는 상원사 중창과 토지의 지급 등 세조 대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세조는 낙산사에도 관심을 보여 12년(1466)에 직접 행차하여 중건케 하였다. 이미 낙산사는 세조 이전에 태조태종이 관심을 보여 왔던 사찰이다. 세조는 이후 낙산사에 직접 행차를 하거나 중건을 지시하고 재물을 희사하였다. 이러한 세조의 뜻을 이어 예종성종은 사찰 중건을 명하거나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한편 보현사에서는 1680년 강릉 지방의 향리층을 중심으로 미타계(彌陀契)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조선 초까지 전승되었던 보현사의 신불계(信佛契)로서 구(舊)미타계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망자(亡者)와 영가(靈駕)의 보시(普施)와 자비(慈悲)를 표방함으로써 향촌민의 종교적 욕구를 수용한 신불계였다. 이와 같이 보현사는 강릉 지역의 중심사찰인 까닭에 고려 전기에 제작한 목조보살좌상과 조선후기와 말기에 제작된 문화재들이 있다.

이 밖에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에 백운사(白雲寺)청학사(靑鶴寺)·용연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사찰은 한 때 폐사되었다가 현대에 들어와 중건되었다.

일제시대인 1922년에 관음사(觀音寺)는 강원도의 3대 본산(本山)이었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와 고성 건봉사(乾鳳寺),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공동으로 출자하여 강릉 불교포교소로 설립되었다. 관음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포교당이라고도 부르는데, 월정사에서 모셔온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보현사에서 모셔온 동종[1794년 주조]이 있다.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에는 강릉 지역의 사찰로 굴산사·등명사·문수사[한송사, 文殊堂]·별연사(鱉淵寺)·산계사·신사(新寺)·신복사·안국사·염양사·용연사(龍淵寺, 龍池寺)·정토사(淨土寺)·지장사(地藏寺)[보현사청학사(靑鶴寺)·칠성암(七星庵)[법왕사]·흥원사(興原寺)를 들고 있다.

『전통사찰현황』을 보면, 강릉의 전통사찰은 보현사·낙가사·관음사·용연사·법왕사로 나타난다.

『불교사원지(佛敎寺院址)』에는 강릉의 사지로 굴산사지·등명사지·방현사지·산계암사지·신복사지·청학암지·한송사지·흑암사지·신사동사지·옥천동사지·장덕리사지·행전동사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 외에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기재된 것을 보충하면, 백련암(白蓮庵)·북돈암(北遯庵)·만경암(萬景庵)·환선암(喚仙庵)이 더해진다.

[특징]

이와 같이 강릉 지역에는 치폐(置廢)한 사찰들이 많이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승려들은 지역민들에게 불교를 전파시키면서 문화를 창출해 나갔을 것이다. 강릉 지역의 불교는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불교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신복사지 석불좌상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월정사 석불좌상을 통해서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세구의 상들은 모두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있는데, 그 중 신복사지와 월정사의 석불좌상은 탑 앞에 놓은 공양상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양식을 취했다. 이 같은 양식의 보살상은 다른 곳에는 전혀 없으며, 통일신라시대부터 ‘명주’라고 통칭되어 온 명주 호족세력의 근거지와 범일사굴산문이 번창한 곳에서만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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