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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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 율산 마을에서 전해 오는 백운 도사 문이계에 관련된 이야기. 효자이며 형제간의 우애도 좋았던 문이계는 일찍이 부모 형제를 여읜 뒤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구름을 부린 백운 도사」는 문이계에 관련되어 전해 오는 기이한 이야기이다. 1994년 영암 문화원에서 발행한 『영암의 전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肅宗) 때, 지금의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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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에 전해 내려오는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 「홍랑과 고죽 최경창의 애틋한 사랑」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최경창과 기생 홍랑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최경창은 북해평사로 함경도 경성에 부임하였을 때 기생 홍랑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후 3년 동안 시묘를 하는 등 뛰어난 절개를 보여 주었다. 2002년 영암 문화원에서 발행한 『고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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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에 제작된 『1872년 지방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영암 추자도의 지도.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은 집권과 더불어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제 개정, 군제의 개편, 군사 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군기(軍器)의 정비와 실험이 이어졌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의 실정 파악이 필요하였고, 이의 일환으로 1871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과 1872년 전국적인 차원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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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무신. 본관은 밀양. 증조할아버지는 김진(金軫)이고 할아버지는 판관(判官)을 지낸 김광후(金光厚), 아버지는 병조 판서에 추증된 김견(金堅)이다. 군기시 첨정을 지낸 김홍발(金弘發)이 형이다. 김경발(金景發)[1597~1624]은 1622년(광해 1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병절교위를 거쳐 녹도 만호를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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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개신리 내동에서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로 넘어가는 고개. 노루재라는 이름은 고개가 황사출림(黃蛇出林)의 명당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고 한다. 영암 지역에서 전라남도 강진군·해남군 등 남쪽으로 갈 때 주로 사용했으며, 다산 정약용 형제가 유배를 갈 때 넘어갔던 고개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의 지리지에서는 노루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호남 지도(湖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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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 있었던 덕진 다리에 얽힌 이야기.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덕진면 경계에는 영암천이 흐르는데, 옛 이름은 덕진천이다. 덕진천에는 덕진교가 놓여 있었고, 덕진교의 서쪽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덕진포 포구였다. 덕진교는 덕진면 덕진리 교변 마을과 영암읍의 역리 마을 사이에 있어 나주에서 영암읍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통과하여야 한다. 그런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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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영암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혹은 남평(南平), 자는 경립(景立), 호는 송와(松窩)이다. 판윤(判尹)을 지낸 서숙명(徐叔明)의 증손자이며, 아버지는 서홍필(徐弘弼)이다. 서희신(徐希信)[1542~?]은 1567년(선조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41세 때인 1582년(선조 15)에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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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농수산물·생필품 등 여러가지 상품을 사고파는 장소. 시장(市場)은 장시(場市), 장문(場門), 향시(鄕市), 허시(虛市)라고도 하는데, 15세기 조선 시대 세종 무렵 사회적 생산이 증대되고, 상품 유통에 대한 요구도 증대되면서 향시가 거론되고 있다. 1430년대 화폐 유통의 활성화를 위하여 지방에 향시를 널리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초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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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신사준(愼師浚)[1734년~1796]은 성리학을 전공하였으며, 궁핍한 생활에서도 책을 읽어 경전에 두루 통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는 변을 맛보고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 간호를 하였고, 상을 치를 때도 예를 다하였다. 이러한 신사준의 효행을 보고 고을 사람들이 모두 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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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있는 승려 도선과 수미의 행적을 기록한 조선 후기의 비.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靈巖 道岬寺 道詵 國師·守眉 禪師碑)는 1653년에 전라남도 도갑사에 세워졌다. 통일 신라 때 승려인 도선 국사와 조선 시대 승려 수미 왕사의 행적과 더불어 비의 건립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귀부의 사선문(斜線紋)과 비신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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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왜구가 달량진으로 상륙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을 비롯한 해남, 진도, 장흥 일대를 침탈한 사건. 을묘왜변(乙卯倭變)은 달량진 사변(達梁鎭事變)이라고도 하는데, 1555년(명종 10) 5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서남해안 지역으로 한정되었으나 거의 전쟁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왜선이 70여 척, 왜구가 6천 명에 이르렀고, 달량을 침범한 후 강진·장흥·완도·진도·영암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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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영암에서 수도까지 세곡을 배로 운반하던 국가 제도. 고려 시대 영암에는 12대 조창으로 장흥창(長興倉)이 설치되었다. 영암군의 관할 아래 있는 영암, 해남, 강진 일대의 세곡을 모아 조운선에 실어 개경에 납입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영암군은 나주 영산창에 세곡을 납부하였다가, 1512년(중종 7) 영산창의 기능이 영광 법성포창으로 이관되자 법성포창으로 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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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같은 성(姓)과 본관(本貫)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집성촌은 한 성씨가 주도하는 동족 마을을 포함해 나타나는 여러 성씨들이 모인 이성 잡거(異姓雜居) 형태의 촌락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동족 촌락, 동족 부락, 동성 촌락, 동성 마을, 동족 마을이라고도 한다. 영암 지역의 집성촌에 대한 기록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식민지 지배를 목적으로 조사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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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영암 출신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아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역임한 최수인(崔守仁)이다. 아들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운서(崔雲瑞), 최구서(崔龜瑞), 최인서(崔麟瑞)이다. 최경창(崔慶昌)[1539년~1583년]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백광훈(白光勳)[1537~1582], 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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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에 있는 신대유·신직·신경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 평산 신씨 삼효각(平山 申氏 三孝閣)은 평산 신씨(平山申氏) 문중의 신대유(申大有)[1780~1850]와 그의 아들인 신직(申(糸+式))[1791~1867], 신경(申經)[1795~1854]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이다. 신대유는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효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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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조광재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세거 성씨.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인하여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당하자 후손인 조광재가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 지종 마을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영암에 정착하였다. 시조인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다. 그러나 언제 귀화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고려 때에 명종·신종·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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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해창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세곡 창고. 영암군 군서 해창은 별칭 원해창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영암군 일대에서 생산된 대동미 등 세곡을 해창에 모았다가 배에 싣고 한양으로 출발한 곳이다. 그런데 이전의 해창은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나 19세기 무렵 망호리의 뱃길이 토사의 퇴적으로 어려워지자 군서면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