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003 |
---|---|
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집필자 | 박걸순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선사시대]
충청북도 북부 지역은 구석기를 비롯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선사시대의 유적지가 많다. 따라서 이들 지역과 인접한 음성에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개연성이 높다. 실제로 삼성면 용성리에서 석영질 암석으로 만든 찍개와 긁개, 밀개 등의 연모가 출토됨으로써 음성 지역의 구석기시대와 문화의 존재를 입증하였다.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고인돌은 소이면 갑산리의 정자안과 삼성면 양덕리 양덕저수지 부근의 바위베기밭, 양덕1리 윗대실 뒤편 산기슭에서 각각 1기가 확인되었다. 선돌은 생극면 생2리 생리 입구의 2기와 감곡면 오향리 선들바위들에 2기가 각각 쌍을 이루고 서 있다. 원남면 상노리의 노래기 뒷산에서는 간 돌칼 1점과 간돌 화살촉 10점이 발견되어 음성 지역 선사문화의 양상을 알려주고 있다.
[고대]
삼한시대의 음성은 마한의 일부였다. 이 시기의 음성과 진천 지방이 구체적으로 마한 45개국 중 지침국(支侵國)의 영역이었다는 학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삼국시대 초기 음성은 백제에 속한다. 이는 백제국이 성장하며 마한 지역이 백제에 통합된 데 따른 결과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지리서에는 “충청도는 본래 마한 지역으로 백제와 신라가 나누어 가졌다”고 하였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충주·청풍·단양·제천·영춘·연풍·청주·진천은 백제가 개척한 곳이었으나 백제가 웅진으로 옮긴 다음 고구려가 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 중기인 4세기 말경 음성 지역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대외 정복사업 등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취하였는데, 그 결과 장수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유역을 점유하여 충청북도 북부 지역인 진천·음성·충주·제천·단양·영춘 등지는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새로 확보한 영역에 지명을 부여하였는데, 이때 음성은 잉홀현(仍忽縣)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노음죽현(奴音竹縣)[현재의 이천군 장호원읍]에 속하였다가 금물노군(今勿奴郡)에 이속되었다. 삼국시대 말기인 6세기 중반경, 신라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한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였는데, 이때 음성 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음성 지역은 한주(漢州)에 속한 흑양군(黑壤郡)의 음성현이 되었다.
[고려]
후삼국시대인 900년, 궁예는 충주와 청주 등지를 공격하였는데, 음성 지역은 이때 궁예의 후고구려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의 음성현조 기록에 의하면 음성은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인데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고 흑양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르다 감무를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음성은 995년(성종 14) 중원도 진주 음성현이 되었고, 1018년(현종 9) 양광도 충주목에 속하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다. 감무는 현령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의 감독관을 이르는 것이니, 당시 음성의 규모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후 1356년(공민왕 5)에 충청도 국원경 음성현으로 개편되었다.
[조선]
조선 초기 음성 지역은 고려의 지방제도와 같이 충주목에 속한 4속현 중 하나였다가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현감을 두었다. 그러나 매우 적은 현이어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음성현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의 제천에 이르기까지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에 이르기까지 17리, 남쪽으로 청안에 이르기까지 26리, 북쪽으로 충주 석적산에 이르기까지 19리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호구는 171호에 726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33명, 선군(船軍)이 46명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음성의 명칭으로 잉홀과 함께 설성(雪城)과 잉근내(仍劤內)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음성은 왜적에 의해 유린되었다. 유성룡의 치계에 의하면 음성은 인근지역과 함께 왜적의 분탕질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결국 음성은 현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어 이웃의 청안현에 병합되고 폐현되고 말았다. 그 후 1617년(광해군 10) 현민들의 진정에 따라 복현되었으나 오늘의 음성읍과 원남면 일원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1662년(현종 3)에는 폐현되어 괴산군에 병합되었다가 이듬해에 복구되었는데, 이처럼 음성군의 병합과 복구가 반복된 것은 당시 음성 지역의 사회경제적 형세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음성은 동도면·남면·원서면·근서면 등 4면으로 유지되었다. 1759년에 편찬한 『여지도서』에는 4면 19리, 1,828호, 8,502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30년이 지난 기록인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21개 리로 2개 리가 증가되었으나 오히려 인구는 6,951명으로 현저하게 감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
음성은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23부로 개정할 때 충주부 20개 관할군의 하나인 음성군이 되었고, 이듬해 8도 체재로 정비될 때에는 충청북도 음성군이 되었다. 1913년에는 충주군 소파면과 사이면 등이 이입되고, 이듬해인 1914년의 군면 통폐합 때 종래의 17개 면에서 군내면·원남면·금왕면·삼성면·대소면·생극면·감곡면·맹동면·소이면 등 9개 면으로 대폭 감소되고 명칭도 맹동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었는데, 이후 광복 때까지 행정구역은 큰 변동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음성 지역의 사회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1937년에 편찬한 『음성읍지(陰城邑誌)』에 의하면, 당시 음성군의 농가는 자작농이 1,412호, 자작겸 소작농이 2,531호인데 반하여 순소작농이 7,870호에 이르고 피용자도 326호나 되어 절대적인 농업구조였던 음성의 농가가 일제의 농촌 수탈로 말미암아 하층 분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권회복운동과 독립투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1907년 구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으로 봉기한 후기 의병에서 더욱 활발한 양상을 보이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한국주차군사령관보고」 등의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9년의 3·1운동 때에는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에 걸쳐 군내 전역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3·1운동 당시 음성 지역에서는 6회의 만세시위에 2천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였고, 여섯 명이 순국하고 열 명이 부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최소의 수치일 뿐이다.
[현대]
음성군은 1956년에 음성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에는 금왕면이 읍으로 승격되는 한편 중원군 신니면 광월리의 일부가 음성읍에, 괴산군 불정면 문등리가 소이면에 편입되어 2읍 7면의 행정구역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이래 공단 조성 등으로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여 2008년 3월 31일 현재 음성군에는 34, 711세대에 88,669명(남자 46,145명, 여자 42,524명)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2007년 혁신도시 지구로 지정되면서 각종 인프라 구축이 추진되고 있어 발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