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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452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집필자 이영문

[정의]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개설]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선사 시대와 문자 기록이 있는 역사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사 시대의 경우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보면 구석기 중기인 약 5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삼한 소국들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되는데,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일대가 마한 54국 중 하나인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또는 내비리국(內卑離國)으로 비정되고 있다.

백제 시대에는 지금의 화순읍·능주면·동복면 지역에 각각 현이나 군을 설치하였는데, 화순읍 지역에는 잉리아현(仍利阿縣), 능주면 지역에는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동복면 지역에는 두부지현(豆夫只縣)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이릉부리군능성군(陵城郡)으로, 잉리아현여미현(汝湄縣)으로, 두부지현동복현(同福縣)으로 지방 통치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 초기에는 여미현화순현(和順縣)이 되었고, 능성군의 속현인 부리현이 복성현(福城縣)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복성현[동복현(同福縣)]이 보성군에 소속되고, 능성군능성현(綾城縣)으로 바뀌면서 나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는 능성현에 현령이 파견되었고,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일대로 비정되는 철야현을 관장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화순현·능주현·동복현의 3개 군현이 독립된 행정 구역과 통치 체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3개 지역의 지방 세력들 간의 우위권 다툼으로 잦은 행정 변천을 보인다. 즉, 화순·능주·동복과 남평까지 어울려 매우 복잡한 합병과 분리, 독립의 과정을 겪는다. 1632년에는 능성현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되었고, 1896년에 이르러 화순군·능주군·동복군 3개 지역을 합해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능주군과 화순군 사이에 분리 또는통폐합이 이루어지다가 최종적으로 화순군으로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사 시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구석기 시대 유적은 동복천과 지석천 일대 30여 곳에서 확인된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으로는 남면 대전 유적한천면 도산 유적, 춘양면 사창 유적 등이 있다. 화순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광여기 루미네선스 연대 측정[OSL]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AMS]으로 보아 1만년에서 5만년 전 사이의 것으로 측정된다. 이를 통해 화순 지역에서 적어도 5만 년 전 무렵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이 확인된다.

화순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 유적은 조사된 바 없지만 인접한 광주광역시의 노대동 유적과 전라남도 보성군의 죽산리 유적이 신석기 시대 유적이다. 이들은 모두 생활 유적으로, 화순 지역과는 야산이나 평지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차후 화순 지역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 시대]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집자리와 고인돌이 있다. 발굴된 집자리는 현재까지 4곳으로, 남면 복교리 2동·능주면 백암리 1동·춘양면 화림리 광대촌·화순읍 내평리 7동 등이다. 그밖에 집자리로 추정되는 도암면 천태리 유적이 있다.

집자리의 입지는 복교리만 강변 퇴적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구릉 정상부와 그 사면이다. 집자리 형태는 대부분 원형이나 방형으로 가운데에 타원형 구덩이가 있고, 그 양쪽에 중심 기둥 구멍이 있는 소위 송국리식이라는 원형 집자리이다.

집자리에서 출토된 유물은 민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돌화살촉·돌끌·돌도끼·홈자귀·돌칼·돌낫·숫돌 등 생활 용구 석기들이다. 천태리 유적에서는 다량의 석재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석기를 제작하던 작업장과 같은 생활 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고인돌이 있다. 화순 지역에서는 183곳 1,934기의 고인돌이 파악된다. 고인돌이 밀집된 곳은 동복천과 사평천이 합류하는 남면 일대, 지석천과 화순천이 합류하는 능주면·도곡면 일대, 화순천 하천가인 화순읍 일대이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곳은 18곳 160여 기이다. 탁자식 고인돌로는 춘양면 대신리 고인돌도암면 운월리 고인돌이 있으며, 기반식 고인돌로는 규모가 큰 남면 절산리 고인돌과 도곡면 효산리 고인돌, 춘양면 대신리의 고인돌 등이 있는데 무덤방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개석식은 모두 무덤방이 확인되고 있고 무덤방은 판석을 이용한 것과 깬 돌이나 강돌을 쌓은 구조이다.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 중 청동기는 아직 없으나 석기·토기·옥이 나온 바 있다. 고인돌의 분포와 출토 유물을 통해 화순 지역에 이른 시기부터 정치 세력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 후기 무덤인 돌무지 나무널 무덤은 통나무관을 사용하고 그 위에 깬 돌 등으로 덮어 밀폐시킨 것으로, 도곡면 대곡리 청동기 일괄 출토 유적과 능주면 백암리 유적이 있다.

[고대]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로 넘어가며 소규모 정치체인 마한 소국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화순 지역에서는 능주면 일대가 마한 54개국 중 하나인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또는 내비리국(內卑離國)으로 비정된다. 또한 동복면 일대를 벽비리국(辟卑離國)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마한 소국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도암면 용강리화순읍 내평리 등 마을 유적과 분묘 유적이 대표적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과 유물로 보아 화순 지역에 마한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마한 소국의 중심지는 백제에 의해 군현이 설치된 곳들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화순 지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뒤 화순읍 지역·능주면 지역·동복면 지역에 각각 군과 현이 설치되었다. 잉리아현은 지금의 화순읍동면 일대로 추정되며, 이릉부리군은 지금의 능주면·도곡면·도암면·춘양면·이양면·청풍면·한천면 일부로 추정된다. 두부지현은 지금의 동복면·남면·이서면·북면·한천면 일부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 유적으로는 도곡면 효산리 모산 백제 석실분을 비롯하여 천덕리 회덕 고분·백암리 고분·내평리 고분·쌍옥리 고분 등 능주 일대의 고분들이 있다.

[통일 신라 시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통치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이에 따라 757년(경덕왕 16)에 대대적인 지방 통치 조직 개편과 군현명의 개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릉부리군능성군(陵城郡)으로 바꾸고, 잉리아현여미현(汝湄縣)으로 개명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일대인 부리현(富里縣)과 함께 능성군 예하에 두었다. 두부지현동복현(同福縣)으로 바꾸고 곡성군(谷城郡)에 속하게 하였다. 백제 시대 화순 지역에 설치되었던 3개 행정 단위 중 화순읍 지역이 능성군으로 흡수되고, 동복 지역은 곡성군의 예하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화순 지역의 문화 유적으로는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탑[국보 제57호]과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비[보물 제170호]가 있다. 철감 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798~868]과 관련하여 건립된 것으로, 선종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으로 기능하였던 쌍봉사의 당시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고려 시대]

화순 지역은 후삼국 시대가 되면서 전라도 지역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892년(진성 여왕 6)에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세력 아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자연스럽게 고려에 속하게 되었다.

940년(태조 23)에는 화순 지역 3개 군현의 이름과 영속 범위에 대한 재편이 이루어졌다. 여미현화순현(和順縣)으로 개칭되면서 나주목의 속현으로 편제되었고, 능성군의 속현이었던 부리현은 복성현(福城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18년(현종 9)의 개편에서는 복성현[동복현(同福縣)]이 보성군의 예하로 소속되고, 능성군의 위상이 격하되어 능성현(綾城縣)으로 바뀌면서 나주목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 동복현은 영군이었던 곡성군이 승평군의 속현으로 내속됨에 따라 보성군의 속현으로 이속되었다.

동복현에는 1142년 이전에 감무가 파견되는 등 격이 높아졌고, 능성현도 나주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화순현을 영속하게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이르면 능성현에 처음으로 중앙에서 현령이 파견되었고, 나주에 속해 있던 철야현[현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일대]을 관장하게 되었다. 화순현에는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파견되었는데, 1394년 남평현이 분리 독립하기까지 남평현 감무를 겸임하였다.

고려 시대 능성현 지역의 토성으로는 구(具)·정(鄭)·문(文)·조(曺)·채(蔡)·주(朱)·강(姜)[진주]·김(金) 씨가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화순현의 토성으로는 배(裵)·최(崔)·오(吳)·윤(尹)·하(河)·박(朴)[순천]·김(金)[무진] 씨들이 토착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복현의 토성으로는 오(吳)·성(成)·박(朴)·선(宣)·화(和)·지(池)·김(金) 씨가 있었다고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고적조 동복현 항목에 따르면 수촌현이 동복현의 북쪽 20리[현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수리], 압곡현이 동복현 북쪽 25리[현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옥리]에 있었고, 대곡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대곡리]과 보령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보월리 보령 마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군현 아래 특수 행정 조직으로 편제되어 있었던 소 2개소와 부곡 1개소가 있었다. 와촌소는 현재 북면 와천리로 추정되며, 품평소이양면 품평리, 율촌 부곡청풍면 세청리 율촌 마을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와 부곡들은 조선 시대에 들어 인접 군현에 편입되면서 소멸되었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고려 후기에 불탑과 불상이 집중적으로 건립된 운주사와 능주 인근 지석천 하천변의 공림사지가 있다.

[조선 시대]

조선 건국 후 지방 편제는 고려의 속현이나 임내·향·소·부곡 등 복잡한 행정 체계에서 군현 편제로 일원화되었다. 군현 편제는 부분적인 변화가 있지만 대체로 변동 없이 1895년(고종 32)의 군현 개편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화순 지역도 화순현·능주목·동복현의 3개 군현이 독립된 행정 구역과 통치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화순현능주목·동복현, 그리고 남평현까지 어울려 매우 복잡하게 합병과 분리·독립의 과정을 겪었다.

1394년(태조 3)에는 화순현에 포함되었던 남평현이 화순현에서 분리되었고, 1396년(태조 5)에는 동복현 감무가 화순현을 겸임하다가, 1405년(태종 5)에는 동복현이 폐지되고 화순현에 합쳐져서 동복현의 감무를 화순현으로 옮기게 된다. 1407년(태종 7)에는 동복현화순현을 합쳐 복순현(福順縣)으로 개칭하였다.

1415년(태종 15)에는 능성현에 속했던 철야현이 남평현에 편입되었고, 1416년(태종 16)에는 다시 동복현화순현에서 분리 독립되어 동복현에만 현감을 파견하게 되었다. 화순현능성현에 합속되어 순성현(順城縣)으로 개칭되었다. 1418년(태종 18)에는 순성현이 다시 화순현능성현으로 분리되어 각각 현감을 두었고, 1435년(세종 17)에는 또 다시 합하였다가 분리되는 등 계속된 변화를 겪었다. 화순 지역의 3개 행정 단위별로 1392년(태조 1)에 능주 향교가, 1434년(세종 16)에 화순 향교가, 1445년(세종 27)에 동복 향교가 건립되었다.

화순 지역에서 발생한 복잡한 군현 재편 과정은 3개 지역 지방 세력들의 우위권 확보 다툼으로 볼 수 있다. 화순 지역에 입향한 성씨나 주요 인물들의 활동, 즉 사림의 활동이 사회적으로 활발했던 시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순 지역에서는 향약의 실시와 같은 사족 활동이 이루어졌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많은 사족 집단들이 입향하거나 이거한 바 있다. 1519년(중종 14)에 조광조(趙光祖)가 능주 지역으로 유배된 것을 비롯해 최산두(崔山斗)의 동복 지역 유배, 양팽손의 낙향 등으로 인하여 화순 지역에 성리학의 보급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죽수 서원(竹樹書院)도원 서원(道源書院) 등 배향 서원들이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화순 지역의 의병 활동은 최경회로 대표되지만 그밖에도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최경회(崔慶會) 3형제와 문홍원 등 수많은 의병들이 활동하였다. 의병을 일으킨 자리에는 고사정(高士亭)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병자호란 때에도 끊임없는 의거들이 이어졌다. 정유재란 때는 최경운 등을 주축으로 한 의병과 향민들이 오성산성에서 왜적과 접전을 하였고, 능성현 지역에서도 예성산성을 거점으로 김대인·김명철 등 의사들과 향민들이 혈전을 벌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조수성 등 많은 의병들이 창의하였다.

임진왜란의 여파로 화순 지역의 군현 편제는 또 다시 격변을 겪게 된다. 1597년(선조 30)에는 임진왜란을 겪는 와중에 세력이 약화된 화순현이 지역민의 민원으로 능성현으로 합쳐졌다가 1611년(광해군 3)에 다시 화순현으로 분리되었다. 1632년(인조 10)에는 능성현인조의 모후인 인헌 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의 관향이라 하여 능주(綾州)로 개칭되고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1655년(효종 6)에는 동복현의 전패가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하여 동복현이 폐해지고 화순현으로 합해졌으나 1664년(현종 5)에는 다시 복구되었다. 이처럼 화순현·동복현·능주목 지역은 빈번하게 폐합·분치를 거듭하였다.

화순 지역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면리 편제를 갖추게 된다. 화순현은 3개, 능주목은 10개, 동복현은 7개 등 화순 지역에는 20개의 면이 설치되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 보면 화순현은 지금의 화순읍동면, 능주목능주면·이양면·춘양면·도암면·도곡면·한천면 일부, 동복현동복면·남면·이서면·북면이 관할 지역이었다.

1759년(영조 35) 만들어진 『여지도서』에 의하면 능주목에는 10개 면 5,033호 1만 9,650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화순현에는 3개 면 1,716호에 5,777명이, 동복현에는 7개 면 2,106호에 7,393명이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합산해 보면 화순 지역에는 총 8,855호에 인구수 3만 2,82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789년(정조 13)년에 나온 『호구총수』는 관할 면·호구·남녀 수·마을명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당시 화순현은 3개면에 1,765호, 인구수 5,967명, 소속리 79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능주목은 10개면에 4,919호, 인구수 1만 8727명, 소속리 159리[면별 합계는 153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복현은 7개면에 2,154호, 인구수 7,729명, 소속리 111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화순 지역에는 총 8,838호 3만 242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여지도서』에서의 조사 30년 후인 『호구총수』의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 중 17호 397명이 감소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시대의 교통 시설인 역으로는 가림역·인물역·검부역이 있었다. 가림역화순현 남쪽 12리[현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내평리]에 위치했으며, 전라좌도 경양역[현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에 딸린 소로역이었다. 인물역능성현 남쪽 25리[현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금릉리 인물 마을]에 있었고, 검부역동복현 동쪽 5리[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한천리]에 위치하였다.

[근현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지방 관제가 대폭 개혁되면서 화순 지역은 또 다른 변화를 맞게 된다.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따라 전국 8도를 23부제로 개편하면서 나주부 안에서 화순군·능주군·동복군으로 각각 개편되었다가, 1895년 9월 칙령 제164호로 능주군은 3등군, 화순군과 동복군은 4등군이 되었다. 1896년 8월에 다시 지방 관제가 13도 체제로 변경됨에 따라 능주군과 동복군이 폐지되어 전라남도 화순군이 되었다. 그러다가 1908년 10월 칙령 제72호에 의하여 화순군이 폐지되고 능주군에 병합되어 동복군과 함께 2군이 되었다. 1908년 능주군은 주내면 남문외리에 치소를 두고, 18면 323동리를 관할하게 된다. 동복군은 읍내면 독상리에 치소를 두고, 7면 150동리를 관할하였다. 1913년에는 능주군이 다시 화순군으로 개칭되었다.

[일제 강점기]

1914년에는 기존의 면리 체제에 대해 대대적인 지방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1914년 3월 부령 제111호에 의해 동복군 7개면과 남평군 2개면의 일부 리, 광주군·창평군에 속한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화순군이라 하고, 총 17면 188리를 관할하게 하여 지금의 화순군과 거의 같은 영역을 갖추게 되었다. 1932년 11월에는 일부 면간 통폐합이 이루어져 광복 직전까지 13면 체제가 유지되었다.

일제 강점기 화순 지역에서는 의병과 항일 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의 의병군에 문달환(文達煥)·양재해(梁在海) 등이 참여하였으며, 1908년에는 이관회(李寬會)안규홍(安圭洪)과 함께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양한묵이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였고, 3월 13일에는 화순면에서 양회준(梁會俊) 등이 만세 운동을 전개한 데 이어, 3월 15일에는 갱무산(更無山)에서 조국현(曺國鉉) 등이, 3월 20일에는 동복면에서 오재인(吳在仁) 등이 주동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현대]

광복 이후 1963년 1월 1일 법령 제1177호에 의해 화순면이 화순읍으로 승격되었고, 1966년 5월 18일 군 조례 제122호에 의해 한천면에 영외 출장소와 이양면에 묵곡 출장소, 도암면에 용강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해 동면 수만리화순읍에 편입되었고,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해 도곡면 주도리를 화순읍에 편입하였다.

1984년 동복 수원지 확장 공사로 이서면 6개리와 북면 1개리 등 7개 리 12개 마을이 수몰되었고, 1990년 주암호 공사로 인하여 남면 7개리가 수몰 지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3년 현재 화순군의 행정 구역은 1읍 12면 188리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2만 9517세대, 인구수는 6만 7829명이다.

이용자 의견
고** 1913년에는 능주군이 다시 화순군으로 개칭되었다. 위사항은 지방연혁연구(김정호 편저)의 오류입니다. 1914년 동복군과 능주군을 폐합하고 군청 소재지를 능주와 동복 중간 지점인 화순면에 두면서 그 명칭을 화순군으로 했습니다. 2015.01.07
고** '1597년(선조 30)에는 임진왜란을 겪는 와중에 세력이 약화된 화순현이 지역민의 민원으로 능성현으로 합쳐졌다가' 내용은 잘못입니다. 문헌비고나 화순읍지에는 임진왜란(1592)의 병화로 현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민원에 의해 1594년 화순현이 능성현에 합친것으로 나옵니다. 곧 전쟁에 징발된사람이 너무 많아 현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겁니다. 2015.01.07
고** '1896년 8월에 다시 지방 관제가 13도 체제로 변경됨에 따라 능주군과 동복군이 폐지되어 전라남도 화순군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없었습니다. 무언가 잘못알고 쓴것입니다 201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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