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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160
한자 城南-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성남시
집필자 강병수

[정의]

성남시에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살아온 사람. 그러나 이동이 심한 오늘날은 단순히 한 세대 이상을 살게 된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기도 한다.

[개설]

토박이는 ‘본토박이’의 준말로, 『국어대사전』에는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한 곳에 살아온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토박이는 유사 이래로 성남지역에서 태어나서 몇 대를 살아오거나 한 평생 또는 한 세대 정도를 성남지역에서 살았던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선사시대나 고대 이전에 살아왔던 성남지역의 사람들의 역사적 자취는 찾을 수 없지만 이들을 토박이로 규정하거나 규정해내는 일은 쉽지도 않고 그렇게 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전통시대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부터 성남지역에서 대대로 살았던 인물들의 자취는 세거성씨나 세거지, 또는 집성촌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성씨가 삼국시대 이전에 들어와 차츰 일반 민인들에게까지 보편화된 시기는 조선 초기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는 지역과 혈연이 합하여진 성씨가 들어와 토성(土城)으로 자리잡으면서 성남의 토박이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남의 토박이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는데, 멀리는 광주 지역의 토성인 김(金), 안(安), 이(李)씨가 있고, 그 뒤 고려 말의 인물 이집(李集)의 아들인 이지직(李之直)탄천변에 은거하면서 일가를 이루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 이전에 성남의 토박이는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후손이 오늘날 중원구 상대원과 하대원 등지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내용]

전통시대에 성남의 토박이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조선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그 내력을 찾을 수 있지만 보다 명확한 사실적 내용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으로 확인이 된다. 이들은 대부분 일정한 지역 내에서 촌락을 이루는 집성촌을 형성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성촌은 일부 약간의 이동은 있었겠지만 그 이동 범위는 성남지역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 같은 집성촌을 이루었던 성남의 토박이들은 신분적으로 양인층 이상만 확인이 가능하며, 그 이하는 기록상 제대로 구명해낼 수도 없지만 역사적 조건이 그들의 자취를 거의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이후 성남의 토박이로 하층민의 흔적은 찾을 방법이 없고, 양인 이상, 그것도 양반층으로 벼슬을 한 인물들에 해당되는 신분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성남지역의 토박이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로 먼저 전통시대부터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왔던 토박이로서, 이들은 개인이라기보다는 어떤 집단적 성격의 토박이로서, 토성을 포함한 세거지 중심의 집성촌의 성격에서 찾아질 수 있고, 두번쩨로는 1973년 시제를 전후한 시기에 성남에서 태어나서 성남시와 함께 생평을 보낸 사람들의 자취와 그들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전통시대 성남토박이로 먼저 세거지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던 성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러한 성씨를 가지고 집성촌을 이루면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모두 전통시대 성남의 토박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성남의 토박이가 되었던 사람들은 토성인 광주이씨(廣州李氏), 광주안씨(廣州安氏), 광주김씨(廣州金氏) 중에서 현재 성남지역을 세거지로 하여 살았던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성남지역을 중심으로 세거하였거나 집성촌을 이루었던 성씨와 세거지는 다음 [표 1]과 같다.

〈표1〉성남지역에 세거하였던 성씨와 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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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지역에 세거하였던 성씨와 세거지

위의 [표 1]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성남지역의 토박이들은 이 지역 문화를 나름대로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각 시대마다 중앙집권적 제도와 문물의 영향을 받았지만 성남지역에서의 독특한 토박이로서의 문화도 전개하였다. 각 세거지에서 전개한 평생의례, 민속, 민간신앙 등과 같은 우리 고유의 것들을 성남지역에서만 독특하게 전개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너더리쌍룡줄다리기 같은 것은 이 지역에서만 독특하게 전개한 민속놀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들 성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거나 세거지를 형성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성남시제 이전의 토박이는 다음 [표 2]와 같다.

〈표2〉1973년 성남시제 이전의 성남의 토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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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성남시제 이전의 성남의 토박이

위 [표 2]의 성남 토박이는 대표적인 사례로, 현재 지난날의 세거지가 동명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성남에 드러나지 않는 특정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해오고 있지만 구전이나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사료들을 통해 차츰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어 두번째로 성남의 토박이는 시제를 전후한 시기에 이곳에 이사를 온 부모님을 통해 정착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973년 전후에 성남지역에서 태어나서 거의 한 세대가 지난 2004년 현재까지 성남시에서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토박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은 20~30대에 해당되는 연령층으로 현재의 성남의 역사와 함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존의 세거지 토박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위[표 2]의 후손들이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나서 현재까지 성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물론 성남의 토박이가 된다. 그런데 이들 두 부류는 어쩌면 그 근본적인 데서부터 성남 토박이로서는 성격을 크게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주한 부모에 의해 결정된 성남 토박이는 다른 지역에서 온 부모님에 의해 중첩된 지역관이 은연중에 각인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들의 성남지역에서의 역사는 20~30여년이고, 그 이전의 역사는 부모님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거지를 이으면서 다시 성남시제의 역사를 가진 성남의 토박이는 오랜 동안 성남지역의 역사와 함께한 진정한 토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전통시대의 성남지역의 문물을 잇고 있고, 현대의 성남의 그것도 함께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왔던 순수한 성남의 토박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전통시대의 성남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제 이후의 현대인 성남맨으로 살아가고 있다.

[변천]

현재 성남지역에는 순수한 성남의 토박이, 시제 이후의 토박이, 그리고 토박이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특히, 토박이처럼 살게 된 사람들은 성남에 애향심과 함께 성남시를 주체적으로 이끌고가는 한축을 이루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토박이 같은 인물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정치분야에서는 이대엽 현 성남시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980년대 성남지역을 누구도 돌아보지 않을 때 풀뿌리 터줏대감으로 국회의원에 3번이나 이곳에서 당선되었다. 이대엽은 의원 재직 기간인 12년을 중앙의 정치무대보다는 성남지역에서 거의 활동하여 성남을 비운 적이 없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남 달동네를 누비며 아무런 집이나 들어가 “밥 한 끼 먹읍시다.”라고 마음이 담긴 친화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그렇게 12년간 성남지역 곳곳을 누비다 보니 자신과 밥 한 번 안 먹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고,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부엌살림의 내용을 훤히 알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2002년 지방자치선거에 다시 성남시장이 된 것도 성남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성남의 터줏대감[토박이]터럼 진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성남의 토박이처럼 성남을 주체적으로 이끌려는 진솔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성남의 토박이처럼 자리잡은 또 하나의 경우는 성남에 호적을 옮기기 시작한 ‘성남의 고향심기운동’이라 할 수 있다. 전국 각 지역에서 몰려온 이주자들의 성격상 자칫 성남시 전체가 갈등이 일거나 항상 타향으로 보고 객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일소하려는 의지가 표출된 것이 바로 이 운동이다. 성남인의 고향만들기는 오늘날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제2세대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흐름은 다음과 같은 20~30대들의 거침없는 표현에서 드러나고 있다. 성남시제 이후에 성남에서 태어난 어떤 30대가 판교신도시 개발 때 아파트 분양을 받으려는 네티즌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다. 즉 그는 “솔직히 저도 성남시 토박이고, 예전에 저희 가족이 야탑동에서 살면서 분당신도시 개발로 덕 좀 보았조. 지금은 별 볼 일이 없지만 말입니다. 저도 당첨이 되었으면 좋겠으나 나이가 31세이고 청약예금도 없지요. 하여튼 당첨되셔서 부자되세요.”

여기서 이 30대는 자신이 성남의 토박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한 것으로 보아 세거지에서 살아온 토박이임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남지역 이외의 사람들이 성남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를 성남의 토박이로 인식하고 있는 사례를 “여친이 1977년부터 쭉 성남에 살고 있는 토박이인데 저와 11월 중순에 결혼할 예정입니다.”라고 토로한 네티즌의 대화에서 읽을 수 있다.

위의 사실에서 2000년대 컴퓨터를 통해 나타나는 변화된 양상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그들이 쓰는 용어로 보아 20대임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인식을 통해서 보면 성남의 토박이는 오랫동안 살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여러 사례들을 볼 때 성남의 토박이에 대한 인식도 차츰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집성촌에 대한 인식보다는 급변하는 디지털시대에 걸맞게 이사를 자주 하지 않고 얼마 동안 일정한 장소에서 생활하면 토박이처럼 취급받는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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