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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일곱 살의 성남 토박이이다. 잠깐 타지 생활을 했을 뿐, 태어나서 줄곧 성남에서 살아왔다. 스스로 봐도 자신이 성남이란 도시의 색채를 많이 갖고 있다. 그런 나의 20대의 삶은 여전히 흔들리는 중이다. 한때 청바지와 통기타로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가수가 있었다. 지금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중견가수가 되어 있다. 라디오 DJ이기도 한 그녀는 청춘의 봄날보다 안정된 지금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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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광1동의 할머니 집에서 태어났다. 산부인과 병원이 아니라, 가정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뭔가 특별한 이력으로 생각될 때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똘망똘망하고 고집 센 아이로 자랐다. “쪼그만 한데 고집 세고 노래 잘 부르고 뭐 그런 아이였던 거 같애요. 말도 잘 하고. 어렸을 때 또 욕심이 무지 많았어요. 애들을 막 휘어잡으려 하고, 그리고 그거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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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대원1동의 중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렵게 사는 아이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였다. 나이 들어 생각해 보면, 그 지역 아이들은 부모의 양육이 부재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경우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리고 놀았다. 그러다 보니 불량 끼가 있는 애들도 생겨났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발언을 잘 하지 못했고, 주눅도 잘 들었다. 편애가 심하던 6학년 때 담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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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무섭고 엄했다. 딸을 아들처럼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꿈도 이루고 인정도 받고, 리더가 될 수 있는 그런 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였을까, 내 기억의 창고에는 아빠에게 혼나던 내가 참 많기도 하다. “강한 사람으로 키우겠다 해서 어렸을 때부터 혼났던 기억이 무지 많아요. 지금은 물론 아빠를 존경하기도 하고 감사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렸을 때 제가 필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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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을 위한 수학능력 시험은 한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있어서 삶의 전환점과 같은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은 성인의 길목에서 맞이하는 커다란 시련이며 도전이며 희망이 되는 셈이다. 나에게도 수능 직후에 삶의 변화 찾아왔다.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소망이라는 게 삶에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고교 시절을 보내면서 줄곧 증폭되어 가기만 하던 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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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다. 나는 한늘품이라는 독서토론부에서 가입했다. 남녀공학에서 몇 안 되는 여학생 전용 동아리였다. 여학생 끼리 모여 세계 명작, 한국 명작을 선정해서 읽고 토론하고, 가끔은 다른 학교를 섭외하여 같이 대외토론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 고등학생 수준으로는 쉽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었다. 보통 네댓 개의 주제를 두고 한 달에 한 번씩 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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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였다. 근데, 이래도 되나? 내 이야기가 이렇게 이렇게 두서없어도 되나? 괜찮겠지. 어차피 이것은 나의 구술일 뿐이니까. 혹시 내 구술이 책으로 나온들 누가 그것을 읽겠어. 그냥 이 구술은 심심풀일 뿐야. 편하게 편하게... 초등학교 때는 음악을 되게 좋아했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고, 방과 후에 학교에서 플루트를 배우기도 했다. 연말쯤에 있는 학교 학예회에서 플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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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많아지면서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청소년기를 겪고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나는, 남들에게 뒤지거나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좁혀지지 않는 격차도 경험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애도 아니고, 어렸을 때는 우물 안에서 최고로 잘 났다고 그러고 살았었던 건데, 그게 아니었던 걸 알아가게 되는 삶이었던 거 같애요.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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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중국어를 복수전공 하면서, 학교에서 보내주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또 심리학 전공과 중국어 전공으로 교직 이수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그때는 미래가 잘 준비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그후 중학교 중국어 교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임용고사 준비를 시작할 때만 해도 꿈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2년간 계속 낙방하고 말았다. 거듭 실패의 고배를 마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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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때 다시 성남으로 돌아오기 전, 우리 가족은 이천 쪽에서 살았다. 아빠는 제조업 분야에서 일했다. 라켓을 만들던 한일라켓, 구두를 만들던 에스콰이어 공장에서 근무하였다. 이천은 아빠의 일터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과 들로 물로 돌아다니던 이천이 그립기도 하다. 그후 성남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 가족은 금광2동에 자리를 잡았다. 경사가 심한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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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학교까지는 고작 5분 거리, 엎어지면 코 닿을 데였다. 그런데도 나는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서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혹시 지각할까 늘 걱정스러웠다. 그런데도 간혹 지각을 했다. 그때마다 심한 벌을 받았는데, 엎드려뻗쳐서 2-30분씩 버텨내는 벌이 많았다. 누구나처럼 나는 학교에서 칭찬도 받고 벌도 받았다. 변호사를 꿈꾸기도 하고, 기자를 꿈꾸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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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중원초등학교 졸업생은 숭신여중이나 금광중학교, 아니면 대원여중[현 대원중학교]으로 진학했다. 내가 간 숭신여중은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했고, 두발이나 복장 규정이 까다로웠다. 많은 아이들이 그것을 싫어해서 금광중이나 대원여중으로 진학했다. 학교까지는 걷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가끔씩은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기도 했지만(그게 누군지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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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처럼, 나는 잠자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갓난아이도 자기를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본다. 나는 어려서 아빠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아빠와의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기 했지만, 잠자리에서 엿들은 대화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때 아빠는 분명 제가 너무 밉다고 말했었다.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듣고 나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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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애증에서 벗어났던 대학 시절은 즐거웠다. 고교 시절 학교에서 받았던 여러 심적 갈등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나는 대학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맘껏 해방감을 누렸고 그것이 너무 좋았다. 외로움을 타지도 않았고, 새로운 환경이 낯설거나 힘들지도 않았다. 적응하는 데 문제도 없었다. “사실 대학교 기숙사는 특별히 4인 1실이 많거든요. 4인 1실에서 3년을 생활했었는데,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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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히 독립 생활 혹은 결혼 생활을 상대원 같은 곳에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상대원은 사람이 많이 산다. 그들 대부분은 어려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다.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좋은 교육을 받으면 좋은데, 상대원에서 그것은 좀 어려운 요구였다. 오히려 편부모 밑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또 술 때문에 불화를 겪는 가정이 많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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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흔들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나에겐 꿈이 남아 있다. “청소년들을 되게 좋아해요.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하고 대화를 나눈다거나 얘기를 나누는 게 되게 기뻐요. 기쁘고 편하고 말이 너무 잘 통하고 그리고 아이들의 삶에 좋은 발전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되게 보람을 많이 느끼고 그게 기쁘고 삶의 즐거움이거든요. 그래서 계속해서 교직을 도전을 해서, 교직 임용고시를 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