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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가 1971년에 상대원으로 들어온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눈이 하얗게 내린 날 상대원고개 마루에서 버스를 내린 후로,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 봉씨의 집은 미아리 천지극장 앞에 있었다. 봉병용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는데, 그는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자기형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면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던 사람이었다. 그가 일자리도 주었고, 가게가 딸린 방도 공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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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는 막노동 판을 전전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열흘 일하고 나면 돈 받으러 다니는데 보름이 걸릴 정도였다.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생겼다. 그래서 한때는 화장품 장수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해 보기도 했다. 400원에 가져다 450원에 팔고 다녔는데 그것도 잘 팔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걸렸다. 봉씨는 사정이 급해 고향 어른들한테 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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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길을 찾아 들어왔지만, 상대원에서도 먹고 살길이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릴없어 하다가, 얼마 전 지나가던 화장품 장사에게 물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굴비장사를 보고 물었다. 굴비 장사하면 밥 먹고 사나요?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것은, 옛날 이야기 책에나 나올 만한 그 황당한 우연성이다. 그때 화장품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고, 굴비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봉씨는 무엇을 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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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의 고향에서 땅 한 평에 4천원 하던 시절, 상대원에서는 20평에 2만원이었다. 한 평에 천원 꼴이었다. 그러니 300평 정도만 사서 팔면 남의 일 안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향 어른들에게 도리가 아닌 듯하여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봉씨는 더 이상 떠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집이라도 팔아 자리잡고 장사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미리 봐둔 가게 자리가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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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때 봉씨는 무척 힘들었다. 큰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약값이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데 잘 걷던 아이의 다리가 마비 증상을 보였다. 그때부터 아이 치료를 위해 침 맞히러 다니랴, 장사하랴, 힘든 하루 하루가 이어졌다. 방도 따로 얻을 돈이 안 돼서 가게에 다락을 매달았다. “여기 가게가 루핑집이었는데, 다락을 매놨어요. 다락에다가 우리가 잠을 잤어요. 서랍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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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에는 이평원 씨라고 야채 장수가 있었다. 이평원 씨는 원래 웃시장에서 장사 잘하고 있었다. 70년대 초만 해도 재래시장에서 야채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품목이었다. 야채는 어려운 사람들이 매일 먹어야 하는 찬거리였다. 생선은 일주일에 한 번, 고기는 형편대로 먹고 없으면 안 먹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랫시장이 살아나려면 야채가게가 반드시 필요했다. “야채가 있어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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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아랫시장은 제대로 된 호황기를 맞았다. 장사가 잘 되니까 점포에는 권리금이 오고갔다. 가게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건물이 없는 형편이었다. 집들을 층을 올리고, 작은 지하실도 파서 활용하기도 했다. 한번은 지하에 다방을 내려고 터를 파다가 계속 물이 나는 바람에 무척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상대원시장터가 원래는 늪지대였던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대형 상가를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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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은 이제 재개발 이야기가 나돈다. 봉씨가 생각하기에도 상대원은 많이 낙후되고 노후된 지역이 되어 버렸다. 마치 낡은 흑백필름 속의 세상을 보는 듯, 혹은 이미 오래 전에 변화가 멈춰버린 고립된 마을을 보는 듯하다. “새로운 신선한 이미지도 없고 노후될대로 됐고, 사람들도 전부 다 나태해졌고. 상인들도 요즘 들어온 사람들도 옛날에 있던 사람이 나태해 있으니까 나태해질 수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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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가 처음 상대원으로 이사왔을 때 상대원의 땅값은 굉장히 쌌다. 한 평에 천원 남짓. 그런데 지금은 전국에서 성남만큼 땅값이 많이 오른 데가 없다. 상대원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들 중에도 복덕방에 자주 놀러다니고 땅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모두 잘 산다. 반면에 착실히 장사만 했던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으로 끝이었다. 다행히 봉씨는 아내가 서둘러, 이사온 지 10여년 만에 집을 장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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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는 70년대 초 호시절에는 옆 가게를 인수해서 3개까지 운영했다. 처음에는 기름가게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고추를 추가했다. 그때 고추를 팔고 빻아주면서 벌었던 돈이 전대에서 흘러나올 정도였다. 한 달 벌이면 집을 한 채 살 정도였다. 손님은 넘쳐났고 장사는 잘 되었는데, 돈은 안 모아지고, 남는 것이 없었다. 고추를 시작한 후 일손이 딸려 종업원을 두게 되었는데, 종업원은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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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은 1970년대 초창기에 제일 좋았고, 80년대까지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막내딸이 태어나고 얼마 후, 그러니까 87, 88년 쯤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있는 대형 상가가 새로 지어지고, 또 노전이 없어지면서 부터였다. “모란시장처럼 천막을 쳐놓고 양쪽으로 노전을 앉혀놓고 노전길에서 사람이 많이 다녔거든요. 그랬는데 저렇게 백화점 식으로 해놔 버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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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는 요즘 손님 한명 한명이 아쉽다. 시절이 변하다 보니, 물건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를 해도 손님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기름장사도 거의 개점 휴업 상태이고, 예전에 그렇게 호황이던 고추장사도 힘들어졌다. “사실은 말만 기름장사지 기름 안 나갑니다. 왜 안 나가느냐. 요즘 주부들이요 맛을 보고 먹어야 되는데 맛을 모르고 값싼 거만 찾아 돌아다니니, 그러니 장사가 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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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는 보통 오전 9시에 가게 문을 연다. 그 시간에 아내는 집안일을 해결하고 좀 늦게 가게로 나온다. 벌써 오래된 생활 규칙이지만, 요즘은 낮 동안에 낮잠 자는 일이 많아졌다. 한참 바쁠 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가 내려오면 둘이 밥 먹고 낮에는 낮잠 자야지. 왜냐하면 손님 없으니까. 혼자 있을 때는 혼자 자버리는 거야. 손님 없으니까.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은 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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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는 쉬는 날이 없었다. 연중무휴로 장사를 했다. 언젠가는 여러 가게가 의논하여 정기 휴일을 정한 적이 있었다. 휴일이 되어 다른 용무를 보고 돌아왔는데 어느 집에서는 가게를 열고 손님을 받고 있었다. 신사협정은 그 후로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장 상인들은 제대로 된 휴일도 찾아먹을 수 없었고, 그럴싸한 취미생활도 하지 못했다. 저녁이 되면 텔레비전 틀어놓고 꾸벅꾸벅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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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굽이 고생고생고생 하면서 살아오는 중에도 아이들 키우는 일이 제일 힘겨웠다. 내외가 장사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늘 저희들끼리 놀았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집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럽혀 있었다. 그럴 때면 큰 소리가 오가고, 속도 상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냉장고를 처음에 쪼매난 거 하나. 참 좋아서 죽겠더라고, 냉장고 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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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은 밥솥 같이 오목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물을 부으면 물이 모이듯 재화가 그득하게 쌓일 장소이다. 시장 사람들은 오랫 동안 그 터에서 삶을 이어왔다. 웃는 날도 많았고, 힘들고 치열했던 날들도 있었다. 한때는 전대에 돈이 넘쳐나도록 장사가 잘 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형마트와 재래 점포가 분리되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면서 시장 기능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구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