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성남문화대전 > 성남의 마을 이야기 > 은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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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정에서 유래한다. 은행시장 뒤 수령 300년의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전한다. 은행나무가 위치한 지역에 정자를 설치하고 은행정이라 지칭했는데 은행동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지역은 남한산성과 경충국도가 연결되어 지형지대가 높고 경사가 심하고 고밀도 주거환경과 좁은 도로로 도시기능이 미약하다는 점, 그리고 은행공원 및 수목관찰원이 위치하여 환경친화적인 주거지역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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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생(56세)으로 달성서씨이고, 태어나서부터 현재의 주거지 은행동에서 살았다. 6.25 직전에 태어났으며 현 남한산성 내에 있는 남한산성초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초까지 다녔으며, 중간에 학군이 바뀌어 성남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거리는 남한산성초등학교가 조금 가까웠다. 당시 중부면에는 중학교가 없어 정식 인가도 나지않은 모란중고등학교에 다녔다. 그게 현재의 풍생중고등학교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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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족은 어머님, 부인, 자녀 1남 2녀로, 큰딸은 시집가고, 막내인 아들이 먼저 결혼하여 손녀까지 함께 살고 있어 4대가 한 집에 살고 있다. 큰딸도 수지에 살고 있어 외손녀가 주로 와 있다. 딸 둘이 마을금고 건물에 함께 고시학원, 입시학원, 피아노학원을 경영하고 있다. 달성서씨로서 증조부 때 현재의 주거지로 이주하였다. 먼 조상은 조선 초의 유명한 서거정 선생이시다.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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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동은 1975. 7. 1. 성남시 조례 제70호에 의하여 단대동의 은행정이를 갈라서 은행동이라 하였다. 1979년 9월 15일 분동하여 은행1동, 은행2동으로 되었다. 1989년 중원구에 편입되었다. 동명은 은행정(銀杏亭)이라는 정자에서 유래한다. 은행시장 뒤편에 높이 30m, 둘레 6m, 수령 약 300년가량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여름이면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은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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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주로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학교를 다녔다. 집에서 만든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입다가 중학교 다니면서 학생복을 입었다. 1960년대가 되면서 주로 시장에서 옷을 사 입게 되었다. 어른들은 바지저고리를 입었으나 아이들은 교복이나 양복을 입었다. 1970년대가 되면서 어른들도 양복을 입게 되어 지금과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혼례, 상례에는 주로 한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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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식단은 없이 주식은 잡곡밥, 김치, 된장, 고추장이었다. 조리는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자체에서 생산한 것으로 만들어 먹었다. 쌀은 뒤주나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고, 채소는 겨울에 움집에 넣어 보관하였으며, 가정마다 메주를 만들어 간장, 된장을 담갔다. 겨울에 시루떡을 해서 집집에 돌려 먹었다. 식량 저장은 뒤주 같은 것이 있는 집도 있으나 이사장 집에서는 쌀 두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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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동은 감나무골, 안골, 배나무골, 이바리골이 있는데,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40여호가 모여 살았다. 달성서씨와 버들류씨(문화류씨)가 10여호씩 살고 연안이씨가 7, 8호 살았다. 주로 초가였으나 서서히 슬레이트, 기와 등의 양옥으로 바뀌고 도시개발이 시작되면서 시장도 커지고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1980년대부터 은행주공아파트나 은행1동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이후 도시화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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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신앙은 기독교로 바꾸면서 유교식에서 기독교로 바뀌어나갔다. 어머니가 서 이사장을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가도록 하여 성인이 되고 부친이 돌아가시고 기독교식으로 추모예배로 대신한다. 종손으로 주도하니 집안어른도 따르게 되었다. 본인이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여기에 대한 문중의 거부감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병이 들어 주위에서는 무당을 시켜 굿을 하자고 야단이었으나 할머니는 이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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