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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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院區金光洞地域-誌-家族史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 |
[김영규]
광산김씨로, 가족은 부인과 자녀 2남 3녀이다. 큰딸은 시집가서 외손녀가 중학교 다니는데 같은 집에서 동거한다. 다른 아들과 딸들은 분가하여 따로 산다. 결혼은 스물두 살에 했다. 부인은 광주이씨로 양주 출신인데, 당시 세살 아래로 열아홉 살이었다. 전통혼례로 처가에서 치르고 다음날 하루에 집에 못 와서 중간에 하남에 있는 친척 집에서 자고 왔다.
선산은 원래 금광2동 현재 신구대학 자리에 있었는데, 도시개발되면서 광주시 실촌면 삼합리 공민산(恭愍山)으로 이장했다. 먼 조상이 고려 말의 충신 충정공(忠定公) 김약시(金若時)[1335~1406] 선생이시다. 광성군 김정(金鼎)의 셋째아들로 1383년(우왕 9)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진현관(進賢官)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성으로 광주 금광리 산곡간(현재 단대쇼핑 부근이라 함)에 은거하여 움막을 짓고 토굴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지금의 금광동이란 이름은 인근 주민들이 광산김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란다. 나의 사는 동네 이름을 전하지 말라 하여 ‘부전오동(不傳吾洞)’이라고도 불렸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얽어 지붕삼아 비바람을 막고 사니, 마을 사람들이 그 의관(衣冠)을 괴이하게 여겨 말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혹은 술과 음식을 대접해도 받지 않아,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라 한다. 김약시의 아들이 김췌(金萃), 손자가 김순성(金順誠)으로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그의 묘소는 창곡동에 있다. 김순성의 현손 김지남(金止男)은 경상감사를 지낸 충신이다. 그의 묘소도 창곡동에 있다. 후손이 번창하고 현달하여 금광동 일대는 광산김씨 집성촌이다.
도시개발 전에는 전체가구 43호 중 15여호가 살 정도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김순성의 묘소가 있는 창곡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엇다. 금광2동에는 아직도 10여호가 있어 비교적 많은 편이나 대부분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고 서울 등지에 거주한다. 문중의 종손도 서울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