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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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院區銀杏洞地域-誌-史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
[서정배]
은행동은 1975. 7. 1. 성남시 조례 제70호에 의하여 단대동의 은행정이를 갈라서 은행동이라 하였다. 1979년 9월 15일 분동하여 은행1동, 은행2동으로 되었다. 1989년 중원구에 편입되었다. 동명은 은행정(銀杏亭)이라는 정자에서 유래한다. 은행시장 뒤편에 높이 30m, 둘레 6m, 수령 약 300년가량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여름이면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은행정이라 불리며, 으능쟁이 또는 은행쟁이라고도 한다.
은행동의 세거 성씨는 순흥안씨, 단양우씨, 동래정씨, 해주오씨, 문화유씨, 이천서씨, 황씨 등이 있었다. 은행1동은 법원 앞 현대아파트 부근과 신구대학 뒤편 마을이다. 은행2동은 성남중앙병원에서부터 은행주공아파트 있는 곳까지이다.
이곳은 개천가를 중심으로 농경지가 있고 세거 성씨가 있다고 하지만, 집단적인 집성촌을 이루지는 못한 것 같다. 골짜기 안의 논골에는 문화유씨가 10여 가구, 지금 은행2동 쪽에는 연안이씨가 7, 8세대, 달성서씨가 7, 8세대 살았다. 나머지 40여 세대는 각 성씨들이 섞여 살았다. 농경지가 많지 않고 산지로 되어 있어 도시화되기 전에는 집단취락이 크게 형성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남한산성 입구에는 금광터가 있다. 서울 송파구 마천동 일대에는 토마토, 참외 등을 많이 재배해서 토마토 줄기 세우는 나무막대를 산에서 부모 몰래 만들어 송파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단다.
남한산성 입구에는 6·25전쟁 때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많이 사살된 곳이라 한다. 이사장의 기억으로는 어렸을 때 마을에서 윷놀이대회, 초등학교 운동회 때 마을대항 달리기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대항 축구대회도 하고 윷놀이대회도 하였다. 농악, 풍악이 마을의 풍습으로 내려왔다.
옛날의 교통은 고개를 넘어서 현재 복정4거리를 가야 버스를 타는 노선이 있고,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 가는 길을 닦아 ‘우남로’ 라 칭하였던 것이 기억에 난다고 했다. 우남로 개통 기념으로 대통령 생일날인 3월 26일 서울에서 남한산성까지 가는 역전마라톤경기를 치렀다고 기억한다. 중부면 관내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모란중학교(풍생중고등학교 전신)를 다녔다.
현재의 교통로는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역[현 산성역]이 5분거리에 있고, 남한산성 버스 종점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수원, 광주, 안양, 부천 등 10여개 이상의 노선이 있어 아주 편리하다. 서울보건대학이 길 건너 양지동에 있어 마을은 항상 활기에 차 있고 재래시장으로 은행시장이 모란시장 못지않게 크다고 한다.
은행주공아파트는 우리나라에서 대도시 아파트 중 가장 쾌적한 아파트라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노인들이 건강을 위해 이곳에 살러 오기도 한단다. 아파트 주민과 단독주택 주민 사이에 괴리감은 없는가 물어보니, 그런 것은 별로 없고 아파트주민이 단독주택 주민을 깔보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1억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5억짜리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을 얕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보건대학이 있어 학생들의 하숙이나 자취하는 오피스텔 내지 원룸이 많은 편은 아니라고 하였다. 서울이 가깝고 외지학생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통학하거나 편의상 교통이 편리하니 멀리서도 거주해도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마을의 생업은 주로 노동자들이었으나 최근에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 동안은 장사, 포장마차, 노점상 등이었으나 지금은 분당이나 서울에 직장을 가진 사람도 있다. 교통이 편리해지니까 생긴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