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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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公慶流以兵曹佐郞-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전관수 |
[정의]
조선 중기 문신인 이경류(李慶流)[1564~1592]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이야기.
[개설]
이희준(李羲準)이 지은 『계서야담(溪西野談)』에 전한다. 이경류는 본관이 한산, 자는 장원(長源), 호는 반금(伴琴)이다. 아버지는 이증(李增)[1525~1600]이고, 어머니는 사직 이몽원(李夢黿)의 딸이다.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조좌랑으로 출전하여 상주에서 상주판관 권길(權吉)과 함께 전사하였다. 후에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되었다.
[내용]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이경류가 병조좌랑으로 있었는데, 그의 형이 가야 할 전투에 계(啓)가 잘못되어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나, 그는 이름이 적혀 있는 대로 자신이 가야 한다고 하여 결국 형을 대신하여 조방장(助防將) 변기(邊璣)의 종사관으로 상주전투에 출전하였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군중(軍中)이 크게 혼란해졌는데, 그의 종이 사태가 불리하니 돌아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일이 위급한데 자신의 목숨만을 부지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종으로 하여금 혼자 집으로 돌아가 그의 식솔들이 도피하도록 일렀다. 그러나 종이 다시 그를 막아서자 일부러 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밥을 구해오도록 시켜놓고, 자신은 그곳을 떠나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많은 적군을 죽였으나 자신도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차후에 이를 들은 온 가족들은 통곡하였고, 종은 목을 메어 죽었으며, 그가 타던 말도 며칠을 밥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에 그가 마지막 편지를 보낸 날로 기일을 삼고, (시신을 찾지 못해서) 그가 입던 옷을 찾아 거두어 관에 넣어서 광주 돌마면 선영의 왼쪽 기슭(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번지)에 장사지내고, 그 아래에는 그때 죽은 그의 종과 그가 타던 말도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경류 묘 및 묘갈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한산이씨 묘역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