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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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擇傔婿保家吉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관수 |
[정의]
사위를 잘 뒷바라지하여 가족을 보호하고 좋은 집터를 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개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원명(李源命)이 지은 『동야휘집(東野彙輯)』에 전하는 야담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이준경(李浚慶)[1499~1572] 집안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충주 남산 밑에 새롭게 정착하게 된 연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준경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남당(南堂), 홍련거사(紅蓮居士), 연방노인(蓮坊老人),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아버지는 홍문관 수찬 이수정(李守貞)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사사된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와 아버지에 연루되어 6살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북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인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배웠고, 이연경(李硏慶)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533년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아가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士流)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권신인 김안로(金安老) 등에게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뒤 김안로 등이 제거되자 홍문관 직제학, 부제학, 승정원승지 등을 역임했고,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567년 하성군(河城君)[뒤에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국정을 보좌하였고,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유배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등 신진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했다. 죽은 뒤에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내용]
이준경은 자기 집 종이었던 피씨(皮氏)에게 사위를 얻어주었는데, 그 사위는 날마다 할 일 없이 놀고 먹기만 하는 게으름뱅이었다. 그러나 이준경은 종의 사위가 이인(異人)임을 알아보고 죽을 때 종의 사위가 원하는 것은 거절하지 말고 모두 들어주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러나 그 사위는 장인에게 돈을 구해 돈벌이를 갔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장인은 거절하지 않고 주었다가 마침내 가산이 탕진되자, 이번에는 이준경의 큰아들집에 가서 재산을 빌려오도록 했다. 역시 이준경의 큰아들도 아무 말 없이 재산을 내주었다가 마침내 이준경 집의 재산도 탕진되었다.
결국 이준경 가족과 그 종은 산속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은 그야말로 모든 논과 밭이 갖추어져 있는 무릉도원이었다.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이곳에서 난을 피할 수 있었고, 그때서야 종의 사위인 게으름뱅이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뒤, 다시 이준경의 큰아들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산속을 떠나 돌아가야 한다는 종의 사위의 말에 따라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충주의 남산 아래 새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