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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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自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창겸 |
[정의]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생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김오(金珸)이다.
[활동사항]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에 제수되었다. 우왕 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을 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 때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기타]
묘는 경기도 광주시 신현동에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 등이 있으며 좌우에 석양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 2쌍이 배열되어 있다. 1987년 2월 12일 ‘김자수 선생 묘’라는 명칭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작품]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