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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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淑 |
영어공식명칭 | Kim Chang-su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천화숙 |
[정의]
1927~?. 군인, 공무원, 사업가.
[생애]
본적은 서울, 고향은 평양, 주소는 광주 중부면 탄리이다. 한국전쟁 기간 중 월남하여 군생활을 하였고, 32세 때인 1958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61년에는 3개월간에 걸쳐 광주군수를 지냈다. 그 후 무적(無籍)으로 전전하다가 개발사업에 착수하여, 1971년 서울에서 모란개척단을 설립하고 대표이사가 되었다.
[활동사항]
일명 ‘김창숙사건’으로 불리는 성남 개발 초기 부동산사건의 장본인이다. 이 사건은 성남(당시 광주) 모란지역 4,200만 평의 땅을 개발하여 인구 250만 명을 입주시킬 목적으로 5년간에 걸쳐 1,328억 원을 투자한다는 주택지 개발계획이었다. 이러한 모란주택지 개발계획은 광주대단지 면적의 12배, 투자액의 15배나 되는 엄청난 대규모 사업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개발계획은 당국의 허가도 없이 8개월 동안 무리하게 진행되다가, 1971년 5월 김창숙이 입건됨으로써 종말을 맞이하였다. 1971년 11월 김창숙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김창숙은 지금의 모란에서 가난한 제대군인들을 모아 황무지 개간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때 대원천이나 단대천은 치수사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비가 오면 자주 범람하였는데, 김창숙은 제대군인들을 동원해 주변의 구릉지와 자갈밭을 농토로 개간하였다. 농지 개간이 점차 진척을 보이자 이에 동조하는 사람도 늘어 그 숫자가 50여 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자 이곳을 모란으로 명명하기 시작했고, 재향군인개척단을 ‘모란개척단’으로 공식화하였다. 그 후, 입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5일장인 모란장과 별정우체국인 모란우체국, 풍생중학교와 풍생고등학교의 전신인 모란학원도 개설하였다. 이렇듯 처음에는 황무지 개척의 건실한 일꾼으로 주위의 인정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광주대단지에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 여파가 모란단지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70년 겨울 서울시에서 개발하던 광주대단지에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 서울시로부터 전매행위 금지조치가 내려지자, 부동산투자가들의 관심은 인근 모란단지로 옮겨졌다. 김창숙은 거물급 인사들을 배후에 구성해 놓고 대규모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즉, 건평 7,000평의 모란시청을 비롯하여 6개의 구청, 100개의 동, 그리고 각급 학교 120여교에, 인구 25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4,200만 평의 부지를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김창숙은 주민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정지작업을 벌여, 20평짜리 택지 분양증을 1매당 38,000~110,000원씩 팔았다. 1971년 8월까지 팔려나간 분양증은 무려 8,000여 매였다. 그때까지 69,000여 평의 정지작업을 하였는데, 6,600여 명이 이미 입주했으며 불과 6개월 만에 986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여기에 모란단지 내에 엄청난 외국 자본과 대기업체가 들어선다고 발표하였다. 이 같은 개발계획은 당국의 허가도 없이 8개월 동안이나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결국 주모자 김창숙이 1971년 유죄판결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정부 당국이 사태수습에 나서 모란단지 입주자 전원을 광주대단지인 현재의 산성동으로 전입시킴으로써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을 모란단지 사건 혹은 김창숙사건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