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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791
한자 閔齊仁
이칭/별칭 희중(希仲),입암(立巖),여원군(驪原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생년 1493년연표보기
몰년 1549년연표보기
본관 여흥(驪興)
대표관직 형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 여흥(驪興).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 사간(司諫) 민수(閔粹)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전적(典籍) 민구손(閔龜孫)이고, 어머니는 김효진(金效震)의 딸이다.

[활동사항]

1520년(중종 1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호당(湖堂)에서 독서하다가 승정원주서로 탁용되어「척간유생도기(擲奸儒生到記)」를 가필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525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재등용 되었고, 사간원정언, 이조정랑을 거쳐 성균관사성으로 있을 때는 문신제술시(文臣製述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536년 호조참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고, 1538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구언전지(求言傳旨)」를 올렸다. 그 후 1541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 대사헌,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중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인종 즉위 후 대사헌을 맡았다가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가 되어 윤임(尹任) 등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齊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여원군(驪原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병조,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거쳐 1547년(명종 2) 좌찬성에 올랐고, 안명세(安名世)의 시정기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녹훈이 삭제되고 공주로 귀양갔다. 적소에서 을사사화로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것을 후회하면서 지내다 죽었다.

[저술 및 작품]

문장과 역사에 능통했으며, 저술로는 『입암집(立巖集)』 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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