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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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翼熙 |
영어공식명칭 | Sin Ikhui |
이칭/별칭 | 여구(汝耉),해공(海公),해후(海候),왕해공(王海公),왕방우(王邦牛)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서승갑,윤종준 |
[정의]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교육가이자 정치가.
[개설]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언론인이자 교육자, 정치인으로서 대통령 후보가 되어 호남 지역으로 선거 유세를 가던 중 기차 안에서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성남에 있는 양영고등공민학교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양영고등공민학교는 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뉘었는데 지금의 양영중학교와 양영디지털고등학교이다.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海公)과 해후(海候)이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왕해공(王海公)’이나 ‘왕방우(王邦牛)’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지낸 신단(申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신익희는 평산 신씨의 오래된 세거지인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내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여러 경력 중 교육자로서의 경력도 많다.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와 국민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냈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에 있던 계림학원이 1949년 6월 1일 광주군 돌마면[현 성남시 분당구 지역] 분당리 157-2번지에서 양영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이때 신익희가 학교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당시 돌마면장 이갑규와 지역 유지 이인구, 한백효 등이 학교 인수에 참여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일시 폐교되었다가 1952년 1월 25일 광주군 돌마면 분당리 240번지에서 다시 개교하였다. 1953년 12월 8일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낙성식을 가졌는데 당시 국회의장이던 신익희가 ‘양육영재(養育英材)’라는 휘호를 써서 주었다.
[묘소]
신익희의 묘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30길 18[수유동 산127-1] 일원에 있다. 2012년 10월 19일 ‘서울 신익희 묘소’라는 명칭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52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서울 신익희 묘소는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국가등록문화재에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변경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