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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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揆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서승갑 |
[정의]
1895년(고종 32)~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를 구축하고 경찰관서 폭파사건으로 체포되어 옥사한 독립운동가.
[생애]
1895년 6월 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이규상(李揆尙), 이규송(李揆松)으로 불리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인해 부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안도현(安圖縣)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 투쟁을 본격화하였다. 이후 단지동맹결사대에 참여하였고 함경북도 경성에서 임시정부 연통제를 구축하였다. 이규철은 경찰관서 폭파사건으로 붙잡힌 후 1922년 7월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하여 실천적인 삶을 보여주었다.
[활동]
1919년 7월에는 단지동맹결사대를 조직하여 직접 손가락을 잘라 투쟁을 맹세하고 참모장으로 활약하면서 동지 20여 명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대한정의군정서 등과 협조하여 무장항일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1919년 9월 전투훈련중 안도현 두도구에서 황용기(黃龍起)와 함께 붙잡혔다. 재류 금지명령으로 같은해 12월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나남(羅南) 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함북 경성군에서 연통제 조직을 완료하고 임정과의 업무연락, 군자금 조달, 기밀 문서의 수발 등의 활동을 하였다. 조직원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경찰관 주재소의 병기탄약을 탈취하여 경찰관서를 폭파하였는데, 이 일로 나남경찰서에 검거되어 1920년 8월 11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도 옥중투쟁을 계속하여 잔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2년이 거의 다 된 1922년 7월 18일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추서]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 포장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