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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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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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1603년 |
몰년 | 1650년 |
본관 | 덕수(德水) |
자 | 추빈(秋賓) |
호 | 능호(菱湖) |
출신지 | 성남 수정구 고등동 |
추증/추서 |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
묘지 |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등자리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등자리 출신. 자는 추빈(秋賓). 호는 능호(菱湖). 이경민(李景閔)의 셋째 아들이다. 조부는 증 영의정 덕풍군(德豊君) 이통(李通)이고, 증조부는 이원근(李元謹)이며, 어머니는 영성군(永城君) 이축의 딸이다. 부인은 김광지(金匡址)의 딸이다.
[활동사항]
1624(갑자)년 소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후 참봉(參奉)으로 진출하였다가 인조(仁祖) 16년(무인, 1638년)에 실시된 문과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 2등으로 입격하였다. 이듬해 사헌부 지평으로, 인조 18년에는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장령을 각각 역임하면서 대간직을 수행했다. 이 때 다시 예조정랑으로 옮겨 판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 예조 참판 정광경(鄭廣敬)과 함께 중국 심양으로 가서 세자의 귀근(歸勤)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해 사례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 후 다시 홍문관 수찬과 교리 등을 거쳐 인조 25년에는 좌승지 우승지를 역임했고, 지제교를 겸하여 이름을 떨쳤다. 봉림대군 책봉 당시 책문(冊文)을 선포하였다. 만년에는 광주부윤으로 나갔다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조곡(糶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고초를 겪기도 했다.
[추증]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묘소]
묘소는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