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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716
한자 李文佐
영어공식명칭 Lee Mun-jwa
이칭/별칭 현도(顯道),세촌(細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성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461년연표보기
몰년 1491년연표보기
본관 경주(慶州)
대표관직 승문원 교검(承文院 校檢)

[정의]

조선 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현도(顯道), 호는 세촌(細村)이다. 증조부는 이진(李進), 조부는 이권생(李權生)이며, 감무 이계상(李繼祥)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다.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늠름하고 덕행이 남과 달랐다. 글을 잘 짓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1480년(성종 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3년(성종 14)에 문과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에 기용되고, 곧 박사, 전적[1484]으로 승진되었다. 같은 해 서장관으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올 때 부사가 비리를 범하므로 논박하여 바로 잡았으나, 부사(副使)의 원망을 사게되었다. 귀국하여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어 승문원 교검으로 옮기고, 춘추관 기주관과 편수관을 겸하였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등을 지냈다. 곧은 성격으로 사헌부감찰직의 물망에 올랐으나 당시 훈구파 세력의 방해로 크게 중용되지 못하였다. 1486년 토지가 척박한 안협지역의 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어진 정치로 안협 현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1488년 벼슬을 그만 두려 하자, 안협 현민들이 가마에 매달려 울면서 말리었다. 할 수 없이 그 후 6년 동안 벼슬을 더 하다가 31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예천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498년 김종직의 제자들이 모두 화를 입은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문좌는 이미 타계하였기에 화를 면하였으나, 처남인 권오복은 사형당하고, 부인과 아들 이절(李節)[1491~1578]은 바닷가로 유배당하였다가 뒷날 중종반정(1506)으로 풀려났다.

[묘소]

묘소는 수정구 복정동에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4.25 활동사항 수정 상세정보 수정 및 활동사항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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