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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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愼誠 |
영어공식명칭 | Lee Sin-seong |
이칭/별칭 | 흠중(欽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산28-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성봉현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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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생년 | 1552년 |
몰년 | 1596년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관직 |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
추증/추서 |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
묘지 | 묘는 금천현 동면(衿川縣 東面)[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안장하였다가, 성남시 정자동으로 천장하였다. |
[정의]
조선 전기 성남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흠중(欽仲). 한양 출신으로 효령대군 이보(李𥙷)의 후손이며, 예빈시별좌 이호(李浩)의 손자이다. 홍주현감 이언사(李彦師)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감역(監役) 희숙(希淑)의 딸이다. 배위는 원주변씨 사과(司果) 극성(克誠) 딸과, 광주김씨 김경태(金景泰)의 딸이다.
[활동사항]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학문에 전념하여 과거에 뜻을 두지 않다가 모친을 위하여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재중(齋中) 장의(掌議)로 이조판서 이이(李珥)가 동인 등의 무함으로 탄핵을 받자 동료유생들을 이끌고 그의 신구(伸救)를 상소, 탄핵의 주동자인 허봉(許篈),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등을 유배하게 하였다. 1583년(선조 16) 관천(官薦)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떼에는 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을 때 상원군수(祥原郡守)인 동생 이충성(李忠誠)으로부터 봉양하던 모친이 전란으로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직하였다. 수 일만에 양주에서 어머니를 상봉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하므로 장례를 치른 뒤 함열(咸悅) 강성촌에 우거하였다. 아들 이목(李楘)이 귀하게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
묘는 금천현 동면(衿川縣 東面)[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위치해 있었다가, 성남시 정자동으로 천장하였다. 1992년 다시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보개산으로 옮겼다. 신도비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형조판서 오준(吳竣)이 썼으며 이조참판 김광현(金光炫)이 전액(篆額)을 하였다. 이신성의 묘와 신도비 등이 자리한 전주이씨 서원군파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