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유(李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822
한자 李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645년연표보기
몰년 1721년연표보기
본관 전주(全州)
자우(子雨)
녹천(鹿川)
시호 혜정(惠定)
묘지 광주군 대왕면 광수산 상우거(廣州大旺面光秀山詳寓居亥坐) 현 성남시
주요 저술 『녹천집(鹿川集)』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우(子雨)이며 호는 녹천(鹿川)이다.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첨추 이후재(李厚載)이고 할아버지는 장령 이형(李逈)이다. 아버지는 금산(錦山) 군수를 지낸 이중휘(李重輝)이며 어머니는 동추 안동 김광찬(金光燦)의 딸이고, 이들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1668년(현종 7)에 24살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사서,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인현왕후(仁顯王后) 책봉시에 도감으로 근무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1683년(숙종 9) 명성대비(明聖大妃)의 상에 고부사(告訃使)로 파견되었을 때 청나라 황제가 일본의 동태와 관련하여 조선을 의심하고 있는 바를 문답을 통해 해명하였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宋時烈)의 사사(賜死)로 인하여 노론이 실각하자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가 1694년(숙종 20)에 갑술환국으로 재기용되어 이후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조판서겸 수어사에 재직 중에는 양역(良役) 변통책을 내놓았고, 당습을 규제하자는 주장을 하고 조정의 여론을 화평으로 이끌 것을 주장하였다. 1704년(숙종 30)에 우의정에 올랐으며 1705년(숙종 31) 돌연한 숙종의 선위하교에 백관을 인솔하여 환수하도록 간청하였다.

1709년(숙종 35)에 비변사에서 험지인 북한산에다 산성을 수축하자는 주장을 다시 발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공사감독의 책임을 졌다. 이후 북한산성 축성은 조신들의 반대의견이 많았고 특히 1719년(숙종 45)에는 내성과 외성으로 축성한다는 비판이 거세어 당사자인 이유(李濡)가 자핵(自劾)하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 38)에 영의정에 올랐고 171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6년(영조 2)에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