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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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嵇 |
영어공식명칭 | Lee Hye |
이칭/별칭 | 차산(次山),현포(玄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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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생년 | 1635년 |
몰년 | 1679년 |
본관 | 덕수(德水) |
대표관직 | 대사간 |
묘지 |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산13번지 |
[정의]
조선 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차산(次山), 호는 현포(玄圃)이다. 이원필(李元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통(李通)이고, 아버지는 이경증(李景曾)이며, 어머니는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평산신씨이다.
[활동사항]
1654년(효종 5)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효종이 죽자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치열할 때, 성균관의 학생으로서 삼년상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를 통렬히 비판하는 소를 올림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60년(현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봉교(奉敎)로 임명되었다. 1662년 정언이 되고, 1665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권점(圈點) 6점을 받았으나 홍문관관원으로 기용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1668년 이조좌랑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에 해운판관(海運判官) 조가석(趙嘉錫)의 탐학과 비리가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을 때,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이를 비호한 것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1670년 다시 등용되어 부교리, 부응교, 사간 등을 거쳐, 다음해 삼남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암행을 마치고 돌아와 전라도지방의 기근이 극심함을 아뢰고 남원, 무안, 진안의 현감을 파직하도록 계(啓)를 올렸다. 그 뒤 동부승지, 우승지, 예조참의 등을 거쳐 1673년 대사간이 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성격이 온화하여 일찍부터 덕망을 얻어 중요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예에도 조예가 있어 문장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묘소]
묘소는 서울시 강동구 하일동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수정구 고등동으로 이장되었다. 묘는 수정구 고등동 산13번지 등자리마을을 지나 적푸리마을로 향하는 고개를 넘으면 삼거리의 좌측 배밭에 인접한 구릉 말단에 동남향하여 있는 2기의 대형 묘 중 상부의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