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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원위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996
한자 鄭金院位田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강병수

[정의]

조선시대에 군사 훈련을 하거나 사열을 하던 평원.

[개설]

정금원평(定今院坪)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복정동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정금원 앞의 넓은 평야로 처음에는 군사를 위한 시초지(柴草地 : 땔감으로 쓰는 풀을 마련하는 토지)로 활용되다가 왕이 사냥을 나서면서 군사 훈련과 사열 장소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왕이 이곳에서 군대 사열을 하고 주변의 산에서 사냥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이 지역은 평평한 평야지대로 남한산성과 서울 송파구와 접해 있어서 당시 삼전도(三田渡)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설립경위]

조선 초 세조 때부터 정금원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이미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475년(성종 6) 거가(車駕 : 왕이 타는 수레)가 광주 정금원 벌판에 이르러 좌상군(左廂軍)과 우상군을 사열하였는데, 이때 병사가 2만 8115명이었다. 사열을 마친 왕은 낙생역 앞 벌판 파오달(波吾達)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듬해 시초를 위한 목장으로 사용하던 곳을 차츰 다른 용도로 개발하자, 이곳을 군사 훈련소로 하자는 주장에 따라 이때부터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고 생각된다.

[변천]

1487년에는 이곳에서 군사 열병과 사냥을 하기 위해 각 지역의 많은 군사를 집결시키도록 왕이 명하기도 하였다. 이 땅은 일시 정동(鄭同)이란 관리에게 하사하였으나 그가 죽자 다시 군사 훈련장소로 국가 소속의 되돌리게 되었다. 그 뒤 1537년(중종 32)에는 군사들의 강무(講武)가 자주 열리지 않았던 탓인지 농민들이 이곳을 많이 개간하여 토지로 이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이후 명종대는 국가의 공지(公地)이면서 관리를 소홀히한 관계로 봉은사(奉恩寺)에서 관리한다는 설이 나돌고 있었고,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에는 정금원평은 조정에서 이름만 알려지고 있었을 뿐 관리는 관가를 떠나 관리되거나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는 둔전이 모자라 정부에서는 정금원평을 분절하여 군사 비용으로 충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정금원은 더 이상 군사 훈련소의 기능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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