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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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泰齊 |
영어공식명칭 | Jeong Tae-je |
이칭/별칭 | 동망(東望),국당(菊堂),삼당(三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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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
성별 | 남 |
생년 | 1612년 |
몰년 | 1669년 |
본관 | 동래(東萊) |
대표관직 | 이조정랑 |
[정의]
조선 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성남시 중원구 신흥동 출신이다. 자는 동망(東望)이고, 호는 국당(菊堂) 또는 삼당(三堂)이다. 정휴복(鄭休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호(鄭灝)이고, 아버지는 이조좌랑 정양우(鄭良佑)이며, 어머니는 홍백순(洪百順)의 딸이다. 부인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숙부는 정양필(鄭良弼)이다.
[활동사항]
1635년(인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1639년 정언, 지평, 헌납을 거쳐 이듬해 이조좌랑을 지냈다. 1642년 이조정랑이 되고, 이어서 응교, 집의를 역임했다. 응교 재직시 공경들의 외방에 재물 요구와 방납(防納)의 폐단 및 능원대군(綾原大君) 객청 토목 역사가 심하다는 상소를 올려 다른 대간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1644년(인조 22) 사간,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순치제(順治帝)에게 간청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환을 허락 받았다. 돌아와서 강빈 옥사사건으로 처남 강문성 등이 유배되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 밀양부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공청감사(公淸監司) 임담(林机)과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후 귀양에서 풀려났고, 다시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이조참의, 승지를 지냈으며, 1659년(현종 1) 송시열의 후원을 입어 동래부사로 나갔다.
동래부사로 재직시 가족을 밀양에 살게 한 뒤 몰래 왕래하였다는 탄핵으로 1661년(현종 2) 영해부(寧海府) 충군(充軍)에 처해졌다. 그러나 금부에서 수령이 월경(越境)한 율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말년에 거의 14년 동안이나 유배지에서 보내는 등 불우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
[저서]
저서로 『국당배어(菊堂俳語)』와 한문소설『천군연의(天君衍義)』가 있다.
[묘소]
묘는 여주 능마리에 있었다. 이장시 무덤에서 미이라인 채로 발굴되었고, 또 함께 묻었던 사초(史草)가 발견되었다. 현재는 수정구 신흥동 음촌(陰村)에 있다. 신흥동에는 동래정씨들이 정착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