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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2172
한자 土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수진

[정의]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씨족집단의 성씨.

[개설]

토성은 지연적 촌락공동체로서의 ‘토(土)’와 혈연적 씨족집단으로서의 ‘성(姓)’으로 구성된다. 조선 초 광주목의 일부였던 성남시 지역의 토성은 정확하게 어떤 성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광주목의 영역은 현재의 성남시 일원과 광주시, 하남시, 그리고 서울의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서초구의 일부까지도 포함한다. 비교적 넓고 큰 행정구역이었던 광주목에 본관을 가지고 있는 성(姓)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광주목의 토성으로 이(李), 안(安), 김(金) 등 셋이 기록되어 있다. 광주의 토성이 모두 현재의 성남시에 거주한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으나 광주목의 가장 요지를 성남시가 차지했다고 볼 때 이들 성씨가 현재의 성남지역과 연관이 있다 할 수 있다.

광주목에 토성이 적었던 것은 고려초에 왕규(王規)와 같은 인물이 호족으로 성장하였고 혜종 때에 난을 일으켜 배제했거나 도성에 가까워 토성으로 정착하는 것을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광주가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대성(大姓)이 자리잡을 듯한데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의 관심거리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낙향하더라도 가능하면 한양에서 100리 이내에 주로 거주지를 정하였다. 교지가 내리면 바로 한양에 올라갈 수 있는 거리가 100리이기 때문에 주로 경기도 지역에 거주한다. 바로 양주, 파주, 여주, 이천, 수원, 안산과 오늘의 성남지역이 속한 광주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성남지역에 조선시대 이후에 집성촌이 많이 형성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집성촌이 성남지역의 도시개발이 있기 전까지 존재하였으나 도시가 형성되면서 대부분 집단 이주하거나 폐촌이 되고 말았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 있는 광주 지역의 토성 이, 안, 김씨를 성남의 토성이라 보아 좋을 것이다. 광주이씨는 고려말에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과 교유하고 신돈을 탄핵하였다는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이 오늘의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토굴을 짓고 은거하여 둔촌동의 지명이 되었다 한다. 둔촌동은 당시에 광주목에 해당하여 광주의 토성으로 분류된 것이다. 그의 아들 이지직(李之直)탄천변에 은거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손자 이인손(李仁孫)이 우의정에 이르고, 이인손의 아들 이극배(李克培), 이극감(李克堪), 이극증(李克增), 이극돈(李克墩), 이극균(李克均)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재상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이들 후손이 주로 오늘의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 하대원에 거주하였다 한다. 이 문중에서 선조 때의 명상 이덕형(李德馨)이 배출되었다.

광주안씨는 순흥안씨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광주안씨이다. 성남지역에는 광주안씨의 세거지나 집성촌이 없고, 경남 함안지방에 많이 살고 있다.

광주김씨는 경순왕의 후손 김녹광(金祿光)이 1236년(고종 23) 몽고군을 격파하고 공을 세워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지면서 광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6.01 내용 오류 수정 요청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에서 순흥안씨와 광주안씨가 서로 관계가 없음을 확인하였으며 이에 해당 문구를 삭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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