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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2674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상훈

[정의]

1392년에서 1863년까지 경기도 성남의 역사.

[개설]

조선시대 성남 지역은 광주에 속해 있었으며, 돌마면·세촌면·대왕면·낙생면 지역이 성남 시역에 포함된다.

[연혁]

1356년(공민왕 5)에 목으로 복구되어 양광도에 소속되어 있던 성남 지역은 조선 건국 직후에도 이 체제가 유지되었다.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한 후, 이듬해인 1395년(태조 4년)에 성남 지역이 속해 있던 광주목은 수원목과 함께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세조 때 진(鎭)을 두어 광주목의 진관 소속으로 여주목, 이천도호부, 양근군(楊根郡)과 지평현(砥平縣), 음죽현(陰竹縣), 양지현(陽智縣), 죽산현(竹山縣), 과천현(果川縣)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 고을이 잠시 혁파되었다가 중종 초기에 복구되었으며, 1559년(명종 14)에 목사를 두었고 1566년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다. 1573년(선조 6)에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다가 1577년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는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였으며, 1623년(인조 1)에 유수(留守)로 승격되어 수어사를 겸하였다. 1626년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이듬해인 1627년 주치(州治)를 성내로 옮겼고 1633년 목사가 토포사를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청군에 대항하였고, 1637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승격되었다. 1652년(효종 5) 수어부사를 두었다가 1655년 부윤으로 복구시켰다. 1683년(숙종 9) 유수 겸 수어사로 승격되었으며, 1690년 부윤 겸 방어사, 토포사가 설치되었다가 1694년 부윤으로 되었다. 1750년(영조 25) 다시 유수로 승격되어 수어사를 겸하다가 1759년에 부윤으로 되었으며, 1795년(정조 19) 유수 겸 수어사로 승격되었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병자호란(丙子胡亂) 은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싸움으로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난 오랑캐의 침입이었다는데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 태종은 친히 1636년 12월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 2만 모두 12만 대군을 심양에 집결하여 예친왕 대선(代善), 다이곤(多爾袞), 패륵(貝勒) 등을 앞세워 침입하였다. 청군은 20여만 군으로 인조가 피해있는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해왔으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 경상, 호남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의병까지 궐기하였으나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피난해 있는 강화도의 패전 소식까지 접하자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대두되었고, 척화파와 주화파의 논쟁 끝에 주화론이 우세하여 결국 조선은 청에 대한 신하의 예를 행할 것, 명과의 관계를 끊을 것, 왕자와 대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 정벌 시 구원병을 파견할 것 등 11개 조문의 정축화약(丁丑和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1월 30일 삼전도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을 행함으로써 전쟁은 드디어 종결되었다.

[행정구역의 변동과 면리제(面里制)]

성남 지역의 역사 전개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광주 지역의 면은 경안(慶安)·오포(五浦)·도척(都尺)·실촌(實村)·초월(草月)·퇴촌(退村)·초부(草阜)·동부(東部)·서부(西部)·구천(龜川)·중대(中臺)·세촌(細村)·돌마(突馬)·낙생(樂生)·대왕(大旺)·언주(彦州)·의곡(儀谷)·왕륜(王倫)·월곡(月谷)·일용(一用)·북방(北方)·송동(松洞)·성관(聲串) 등 23개 면인데 그 중 돌마(突馬)·낙생(樂生)·대왕(大旺)·세촌(細村)의 4개 면이 성남 시역에 편입되었다. 1846년(헌종 12)에 간행된 『남한지(南漢志)』에 의하면 광주 지역 전역을 지역별 위치에 따라 상도(上道)·중도(中道)·하도(下道)의 3구역으로 나누고, 상도에 7개 면, 중도에 9개 면, 하도에 7개 면으로 도합 23개 면을 분속 설치하였는데, 성남 시역으로 된 돌마·세촌·낙생·대왕은 중도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당시 4개 면이 포괄하던 동리는 돌마 2개 동리, 세촌 4개 동리, 낙생 5개 동리, 대왕 17개 동리였다.

[인구]

면리별 인구수가 기록된 조선 후기 1760년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돌마면은 495호 2,505명, 세촌면 423호 1,850명, 낙생면 639호에 3,351명, 대왕면 776호 3,733명이었으나 1846년에 간행된 『남한지(南漢志)』에는 돌마면은 460호 2,364명, 세촌면 375호 1,674명, 낙생면 579호에 2,392명, 대왕면 772호 3,771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인구 조사의 부정확성과 두 차례에 걸친 국란, 유행성 전염병 등으로 인구 감소 현상이 나타날 수 있지만, 19세기 중엽이면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어린 아이나 죽은 자에게도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등 온갖 부정하고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자가 속출하고, 출생 신고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실제 인구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교통과 역원제]

조선 후기 성남 지역을 통과하는 간선 도로는 서울에서 신천진~송파참~음촌참~이보현~경안참을 통과하여 동래까지 이르는 좌로(左路)와 서울에서 양재역~율현점~낙생역~용인을 통과하여 통영까지 이르는 중로(中路)가 있었다. 성남 시역에 속하는 음촌참, 율현점, 낙생역으로 행로자의 숙식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낙생면 판교에서 돌마면 남부 지역을 서쪽으로 관통하여 추령[가실고개, 현재의 분당구 장안동]을 거쳐 오포로 통하는 지선 도로가 있었는데 이 도로는 중로와 좌로를 동서로 연결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돌마역이 이 지선 도로상에 있었다.

[학문과 교육]

16~17세기부터는 각 지방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재향 자제들을 교육하였는데, 성남 지역인 대왕면에는 1684년(숙종 10)에 수곡서원이 건립되어 이의건(李義建), 조속(趙速), 이후원(李厚源) 등을 배향(配享)하였다. 또한 광주는 실학의 진원지였으며, 천주교도들의 학문 연구와 포교 활동의 배경 지역으로 현 분당구 율동의 속칭 '큰능안' 산골짜기에는 대원군 천주교 박해 때 이를 피하여 은신했던 천주교도들의 거주지인 성교촌(聖敎村)이 해방 후까지 실존하였다.

[광주민란(廣州民亂)]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한 뒤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간 정치적 실권이 국왕의 외척의 손에 넘어가게 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인해 가난에 몰린 농민들과 몰락한 양반들은 민란을 일으켰는데, 19세기 초 홍경래(洪景來)의 난과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임술민란(壬戌民亂)이 대표적이다. 진주에서 시작된 임술민란은 1862년(철종 13)에 광주(廣州) 지방까지 파급 되었다. 1862년 11월 결미(結米)에 대한 불만으로 수천명이 집결하여 소요가 일어났는데, 한성(漢城)에서 가까운 광주 지방에 민란이 발생하자 비변사(備邊司) 등 정부에서 적지 않게 당황하여 민란 주모자의 엄중한 처벌을 명하였으나 오히려 농민봉기는 인근 지역으로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3.21 오탈자 수정 1934년(태조 3년) -> 1394년(태조 3년) 1935년(태조 4년) -> 1395년(태조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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