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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에스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3060
한자 黃愛德|黃愛施德
영어공식명칭 Esther
이칭/별칭 황애덕,황애시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윤종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 4월 19일연표보기 - 황에스더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5년 - 13세 때 평양 정진여학교 3학년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0년 - 이화학당 중등부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비밀결사 송죽회 결성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일본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 일본에서 2.8독립선언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3.1만세운동 참여(5개월간 옥고를 치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0년대 - 성남에서 활동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대통령 표창
몰년 시기/일시 1971년 8월 24일연표보기 - 황에스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건국포장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건국훈장 애국장
출생지 황애시덕 - 평안남도 평양시 대찰리 151
거주|이주지 거주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활동지 활동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여성운동가
성별 여성
대표 경력 2.8독립선언 및 3.1만세운동에 참여|비밀결사인 송죽회를 구성|옥고 치름|최용신의 스승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성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

[개설]

황에스더는 1913년 비밀결사대 송죽회를 조직해 학생들과 항일 정신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마련해 중국의 항일 단체를 지원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비슷한 한글 이름으로 황애덕(黃愛德)은 ‘황애시덕(黃愛施德)’이라고도 불렸다. 1892년(고종 29)에 태어나 1971년에 별세했다.

황에스더는 미국에서 유학한 후 1929년 초에 귀국하여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사업지도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가르친 학생이 계몽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농촌운동가 최용신이다. 이 스승과 제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일본의 조선 수탈이 노골화하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 정착해 농촌계몽활동을 벌였다.

[가계]

황에스더는 유학자인 황석청(黃錫淸)의 딸이다. 동생은 언론인이자 여성운동가였던 황신덕이고 남편은 박순보이다.

[활동 사항]

황에스더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숭의여학교에 재직하면서 비밀결사대 송죽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이 비밀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중국의 항일단체에 보냈다. 1918년에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동경유학생회를 조직하기도 한다. 1919년 2월 6일 황에스더는 “남녀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여성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열변하고, 이틀 뒤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 후 파리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로 파견되는 신마실라(申麻實羅)의 여비 마련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 후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또한 김마리아와 함께 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다시 일본 경찰에 잡혀 3년형을 언도받았다. 형기 1년을 남기고 가출옥한 뒤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고 졸업한 후에는 모교의 사감 겸 교사로 재직했다. 1930년 박순보와 혼인하고 하얼빈으로 가서 교포사회에서 계몽활동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의 수탈이 극심해지는 시기에 황에스더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 262번지[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로 이주했다. 당시는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병참 기지화하고 군수품과 물자 등의 수탈을 가속화하던 시기였다. 황에스더는 『신여원(新女苑)』에 실린 「‘백현리 농장’에서 2차 대전 말기」에서 일본이 청소년들까지 군대로 끌고가 밤낮으로 전쟁 연습을 시켜 그 꼴을 보지 않으려고 백현리 농장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일제가 자행했던 강제징용과 위안부 강제동원, 한글 말살 등의 수탈과 문화 말살 정책에 대해 당대 지식인들은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항일운동에 몸을 바쳤지만 일부는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기도 했다. 황에스더는 변절하지 않고 농촌으로 돌아가 청소년 교육을 위해 힘썼다. 일본이 조선 농민의 식량을 공출하는 것을 막으려고 곡식이 생기는 대로 떡이며 엿이며 두부라도 만들어 양껏 소비했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동요를 가르치거나 몰래 애국가를 가르쳤다. 8.15 해방이 되자 태극기를 만들어 마을사람과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여성문제에 천착했다. 6.25전쟁 때에는 미국에서 12개 주를 순방하면서 구호품을 모아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에 귀국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한 뒤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을 모아 기술 교육을 했다. 1967년에는 3·1여성동지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을 맡고 항일운동에서 활약한 여성동지와 함께 사회운동에 진력했다.

[저술 및 작품]

황에스더는 기고문 「황무지를 헤치며」 등의 글을 썼다.

[상훈과 추모]

황에스더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황에스더가 성남 지역에서 활동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 도피와 피난 생활을 하면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고, 당시 사회에서, 특히 지방에서는 여성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남시에서는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사업을 국내 최초로 시작하여, 그 성과로 황에스더의 생애를 담은 웹툰을 이화신 작가의 작품으로 DAUM 웹툰에 연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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