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0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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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昌大君 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탄리로131번길 4-12[태평동 491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종준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606년 2월 5일 - 영창대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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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614년 음력 2월 10일 - 영창대군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623년 - 영창대군 묘지석 제작 |
이장 시기/일시 | 1971년 8월 - 영창대군 묘 이장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3년 9월 19일 - 영창대군 묘 경기도 기념물 제75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영창대군 묘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영창대군 묘 -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번지 |
원소재지 | 영창대군 묘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탄리로131번길 4-12[태평동 4911] |
출토 유물 소장처 | 영창대군 묘지석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6가 168-6] |
성격 | 묘 |
양식 | 원형 토분 |
관련 인물 | 선조|인목왕후|영창대군|광해군|강화부사 정항|임해군 |
소유자 | 전주 이씨 안성군 종친회 |
관리자 | 전주 이씨 안성군 종친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기도 기념물 |
[정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있던 선조의 아들 영창대군의 묘.
[개설]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의 이름은 이의(李㼁)이며, 선조(宣祖)와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 임진왜란의 위기 상황에서 적자(嫡子)가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선조가 승하하고 왕이 된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고, 광해군 4년에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김직재(金直哉)를 역모죄로 처형했다. 또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하기에 이른다. 이는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과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벌인 옥사였다. 광해군은 처음에 영창대군의 제거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이첨 등이 지속적으로 주장해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고 결국 살해했다.
인조반정 후 자리 잡은 성남의 영창대군 묘는 수정구 태평3동 4911번지에 있었다. 그러다 광주대단지 개발 때 안성으로 이장하고 묘지석은 묻힌 채로 있었다. 후일에 도시가스관 매설 공사를 하던 중 묘지석이 출토되었는데, 중장비에 찍혀 파손되었다. 당시 수정구 태평3동 29통장이던 정상용 씨가 신고하여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져있다. 『조선왕조실록』 1613년(광해군 5) 5월 4일 기록에는 영창대군이 제안대군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성남문화원에서는 1993년 9월 향토문화연구소를 설치하고 그 해 11월 16일 제2차 연구위원회의를 열어 「영창대군 묘지석 반출 반대결의문」을 채택하고 지역 문화유산의 보호 방안을 협의했다. 이어 그 해 12월 16일에는 제3차 연구위원 회의를 열고 영창대군 묘지석에 관한 협의를 가졌으나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현재 성남에는 영창대군 묘지석 탁본이 성남문화원에 게시되어 있다. 영창대군 묘지석의 파손된 모습은 현대화 개발 사업에 따른 문화유산 파괴를 실증하는 본보기이다.
[위치]
영창대군 묘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3동 4911번지에서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번지로 이장되었다.
[변천]
영창대군 묘는 처음 서울시립대 부근의 배봉산에 있다가 인조반정 이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3동 4911번지로 이장되었다. 다시 광주대단지 개발로 인해 1971년에 현재 위치인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에 이장되었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형태]
영창대군 묘는 흙으로 쌓은 원형의 토분이며, 상석과 향로석, 동자석과 문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묘지석은 영창대군 묘가 안성으로 이장될 때 같이 옮겨 가지 못하고 묘 주변에서 매설 공사를 하다 발견되었다. 묘지석의 재료는 대리석이고 크기는 가로 76cm에 세로는 107cm, 두께는 20cm이다. 글은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지었고, 글씨는 김천령(金天齡)이 1623년(인조 원년) 8월에 썼다.
[금석문]
옛날에 세운 묘표는 앞면에 ‘영창대군 증시(贈諡)소민공지묘(昭愍公之墓)’라 새겼다.
[현황]
영창대군 묘 옆으로 1990년에 새로 세운 묘표가 있다.
[의의와 평가]
영창대군은 조선 시대 왕위를 이어받을 중요 인물이었으나 광해군에 의해 어린 나이에 희생되었다. 당시 중앙 권력의 암투와 왕손의 불행한 역사를 고증하는 유적이며 왕실의 장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묘의 이장과 묘지석의 출토 과정에서 파괴된 모습은 1968년 서울시 철거민 이주 대책으로 시행된 광주대단지건설 사업의 부실함과 문화유산 보호정책의 부재를 실증하는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