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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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錦蘭 |
이칭/별칭 | 향곡(香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종준 |
[정의]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활동한 무용 예술인.
[개설]
정금란(鄭錦蘭)은 한국 무용 전문 예술인으로서 성남의 무용 뿐 아니라 국악협회와 성남문화원의 개원에 참여 했으며, 한국무용협회 경기도지회 창립에 기여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정금란의 작품들은 전통문화와 역사성 그리고 향토적 특성이 잘 반영된 작품이 많은데, 1992년 ‘춤의 해’에 개최된 제1회 전국무용제에서 〈학의 노래〉로 장려상을 입상하였고, 〈남한산성 축성놀이〉, 〈산성풀이〉 등이 그 예이다.
정금란(鄭錦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현 국가무형무산]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김여란의 수도국악예술학원에서 판소리와 가야금을 사사하였고, 김근희 등과 함께 무용 스승이던 이소애 선생을 따라 ‘극동무용학원’에서 무용을 배우게 되었다. 극동무용학원 조교사가 되면서 제품집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무용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20대 후반에 횡성읍으로 내려가 동네 아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이어서 속초에 방송국이 이전하면서 생긴 유휴 건물을 무상 임대하여 속초무용학원을 만들고, 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한편 연중행사인 ‘설악제’에 출연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9세에 김성태와 결혼하고 1973년에 성남으로 와서 1974년 9월에 성남무용학원을 개원하여 후진 양성을 시작하였다. 성남 최초의 무용공연인 1975년 10월 6일 수진동의 제일극장에서 ‘정금란문하생무용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안방 무용 국악 감상회’를 개최하고, 1973년 학림회를 창단하여 정금란 외 김근희, 조흥동, 채상묵, 이명자, 국수호, 김숙자 등 여럿이 모여 포럼과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원로 선생을 초빙하여 워크숍을 개최하였다.
1980년 12월 22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전국무용인 합동공연에서 ‘승무’를 9명 군무로 출연했는데, 승무를 군무로 선보인 최초이고, 성남 출신 무용인들이 전국 무대에 처음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1981년 7월 7일 성남시민회관[현 성남아트리움]이 개관했을 때 회관에는 무대조명도 설치되지 않아서 사비 300만 원을 들여 무대조명을 희사하였다. 1982년 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장학전수 및 이수자로 선정되었고, 1985년 4월 23일 성남무용협회 초대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92년 춤의 해를 맞아 처음 제정된 제1회 전국무용제에 경기도 대표로 선발되었고, 김성태 작 〈학의 노래〉 안무로 참가하여 장려상에 입상하였다. 특히 그 해에, 그동안 도청 소재지에 있던 시 지부가 도 지부를 겸하던 관행을 변화시켜 전국 최초로 경기도연합 무용 도지회를 구성하는 데 산파역을 담당하여 초대 한국무용협회 경기도지회장에 추대되었다.
정금란은 성남문화원과 한국무용협회 성남지부[현 대한무용협회 성남지부], 한국국악협회 성남지부를 결성하는 데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성남무용협회 초대부터 3대까지 지부장을 맡았다. 또한 한국무용협회 경기도지회 설립을 추진하고 초대 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경기도립무용단을 창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정금란의 작품으로는 학의 노래, 남한산성 축성놀이, 산성풀이 등 다수가 있다.
[묘소]
정금란의 묘소는 성남시 영생원 제2 추모의집 소망실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금란은 성남예술대상, 경기예술대상, 경기도 여성상을 수상했다. 1994년 6월 28일 지병으로 타계하자 성남의 예술인들이 모여 ‘성남예술인장’으로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