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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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益三 |
영어공식명칭 | I Iksa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윤종준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8월 - 이익삼 의병 활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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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이익삼 활동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경기도 성남과 광주,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개항기 의병장.
[개설]
이익삼(李益三)은 개항기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키고 한남창의소(漢南倡義所)라는 이름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한 것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다음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 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8월 1일 한국의 군대를 해산하여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내정간섭까지 함으로써 한국의 식민지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을 중심으로 정미의병 항쟁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하사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이익삼은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8월부터 용인을 근거지로 삼아 농민 출신 정기인(鄭基仁) 등 부하 30~40명과 함께 광주·죽산·양성 등지를 넘나들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익삼은 1908년 1월 일시적으로 의진을 해산했다가 1908년 5월 다시 의병을 모으고 40명 안팎의 부하들과 함께 귀순을 권고하는 친일 세력 및 자위 단장 등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다 1909년 6월 2일 용인에서 체포되었다.
이익삼은 또한 고시문(告示文)을 만들어 각지에 배포하였는데, 고시문은 강복선(姜卜先)을 통하여 성남 지역에도 배포되었다. 강복선은 1908년 음력 4월 초순에 이익삼 의진에 들어가 활동했는데, 같은 해 4월 11일쯤 이익삼이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발부한 “의병을 위하여 군수전(軍需錢) 5,000냥을 내놓아야 한다.”라는 내용의 고시문을 광주군 궁내동(宮內洞) 주민들에게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광주군 궁내동은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며 전주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또 조윤봉(趙允奉)은 1908년 음력 2월께 이익삼 의진에 들어가 의병 22명과 함께 광주군 돌마면(突馬面) 수반리(樹盤里)에서 25원, 역동(驛洞)에서 백미 3섬을 모집하였다. 수반리는 숲안, 즉 수내리이고 역동 또한 인접한 지역이다. 이렇듯 이익삼 의진은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과 수내동, 정자동[역말]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량미를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