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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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孝純 |
영어공식명칭 | Han Hyosun |
이칭/별칭 | 월탄,장헌공,면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종준 |
출생 시기/일시 | 1543년 - 한효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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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21년 - 한효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08년 - 한효순 신원 |
거주|이주지 | 한효순 은거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 |
외가|처가 | 한효순 처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 |
부임|활동지 | 한효순 부임지[영해부] - 경상북도 영덕군 |
묘소|단소 | 한효순 묘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63-1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 | 좌의정|판중추부사|영해부사 |
[정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무신.
[개설]
임진왜란 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요청으로 선조(宣祖)가 한효순(韓孝純)[1543~1621]을 한산도에 파견하여 무과를 실시하게 하였다. 이후 한효순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각종 군수 물자를 원만하게 조달하여 해전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이다.
[활동 사항]
한효순은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해부사 재임 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좌도 관찰사로 승진하였고, 순찰사를 겸임하여 경상도 안동을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을 방비하며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한효순은 항상 자주색 도포를 입고 나팔을 울리며 감사의 위엄의 보이고 성대하게 베풀었으며, 각 고을에 주둔한 왜적이 성에 올라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태연히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하였으며, 이 때문에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고 한다. 피난 중이던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소식을 전하자 임금이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 하였다.
1596년(선조 29) 윤 8월, 선조가 한효순을 한산도로 보내어 군사들에게 무과(武科)를 보게 했는데, 이는 통제사 이순신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어 12월에는 조선의 수군 업무 일체를 관할하게 되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힘을 다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오는 길을 막으려 하니, 각 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진력해 수병(水兵)들을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다. 조정에서 부체찰사 한효순에게 수군의 일을 전담하게 하자 3도의 수병 및 격군(格軍)[뱃사공의 일 도와주는 사람], 식량을 밤낮으로 조달해 들여보내고, 병선(兵船)과 기계를 급히 수리해 이순신이 적을 막는 힘을 부추겨 주었다. 한효순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자 이순신이 적을 막을 일을 상의하였다고 전한다.
광해군 대에 우의정, 좌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다. 1617년(광해군 9)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소극적인 자세로 관망하는 동시에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렸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한효순이 최고 책임자로 지목되어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판중추부사로 사망하였다. 1908년(순종 2) 신원되었다.
[학문과 저술]
한효순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3년(선조 36) 『신기비결(神器秘訣)』이라는 군사 전문 서적을 편찬하였는데, 대포에서 조총, 천자총 등 18가지 종류에 이르는 각종 화기의 제작과 사용하는 데 필요한 연장 및 화약의 용량, 탄환의 종류와 용량, 화기 취급상의 주의 사항, 총기를 깨끗이 손질하는 방법 등을 수록하였다. 또한 화기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도 병법을 모른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면서 여러 가지 병법을 첨부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유일의 화약 병기 사용법에 관한 해설 병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진설(陣說)』을 저술하였다.
[묘소]
한효순의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63-1번지에 있다. 비문은 생전에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신도비는 신원이 된 후인 1924년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병관(李炳觀)이 지었고, 박기양(朴箕陽)이 썼으며, 윤조영(尹祖榮)이 전(篆) 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헌공(莊獻公)이다.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 자리한 모헌재(慕獻齋)에 배향되었다.